詩가 있는 아침

물통 -김종삼

시인 최주식 2012. 5. 9. 22:39

[시가 있는 아침] 물통

물통 -김종삼(1921~1984)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스무 살 무렵, 학교 앞 카페의 벽에 걸려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를 내려다보던 ‘물통’. 그것이 삶이든 시 쓰기든 인간에게 물 몇 통 길어다 준 게 전부였다는, 이상하게 사무치는 고백으로 여러 청춘들에게 문학병을 선사했던 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가슴에 와 맺히는 건 그 겸허함보다 물 몇 통 길어다 바치는 일의 어려움이다. 아마 저 물통은, 여백이 더 많던 시인의 작품들처럼, 비어 있기 일쑤였으리라. 이분은 나중엔 역력히 술을 억누르지 못했는데, 그 또한 이것과 관련돼 있겠지. 물 몇 통 얻기 위해 술병들 적잖이 쓰러뜨리는 일도, 이런 시쯤 되면 적잖이 용납되겠지.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