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물맛 - 장석남

시인 최주식 2012. 6. 10. 22:48

[시가 있는 아침] 물맛

물맛 - 장석남(1965~)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여름 한낮, 밭에서 돌아와 찬물 한 대접 비우고 시원하게 숨을 내쉬며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세상에서 물이 제일로 맛있다.” 냉수를 들이켜면 입안에 고이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맛. 물 내려간 몸 깊은 곳에서 올라온 텅 빈 생기가, 맨발과 걸음걸이와 바람의 메타포를 딛고 인생 후반의 서늘한 보리 언덕을 내려간다. 사랑도 있겠지만 죽음도 꼭 만나야겠지. 하지만 그 너머에 영원도 어른거리리라. 벗고 비운 ‘훤칠한’ 마음 없으면 후반전은 고전하리라. 이 물맛, 살맛 난다.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