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밥해주러 간다/유안진

시인 최주식 2012. 12. 23. 22:36

밥해주러 간다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한 막내 눔 밥해주는 거
자슥 밥 먹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뭐여?
구경꾼들 표정 엄숙해진다.

―유안진(1941~ )

소에게 여물을 줄 때 그 손은 거룩하다. 소의 여물 먹는 소리는 지상(地上) 최고의 음악이다. 종일 굶은 개에게 저녁밥을 줄 때 동쪽 하늘의 별은 거룩한 빛으로 바뀐다. 젖 뗀 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 밥풀 묻은 볼따귀와 포도송이 같은 눈빛은 마음으로 스며들어 이내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저수지를 만들어 놓는다. 저 세상 태초(太初)로부터 흘러온 물길, 다시 저 태허(太虛)로 흘러가 닿는 생명의 물길! '모성(母性)'이라거니 '사랑'이라거니 '아가페'라거니 하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겹겹의 감격이 거기에는 있다. '자식 밥 먹이는 일'이 모든 일의 우선이며 많은 사람이 자식 밥 먹이기 위해 길 위에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도 실은 없다. 못나고 부족한 자식은 더 마음이 쓰인다. 실제로 못나고 부족한 것이 아니지만 세상의 해괴한 잣대는 그렇게 서열 지어 묶어놓는다. '취직 못한 막내 눔'이 점점 많아진다. 서둘러 적색(赤色) 신호등을 건너는 할머니도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