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버리는 것이 그저 가난 때문이라면 차라리 덜 아프겠다. 처음에 그는 가난한 젊은이였으리라. 그러다간 가난이 개인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탓이기도 함을 알게 된,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려 하는 젊은이가 되었으리라. 그는 가난해서, 가난한 운동가여서 제 인간적 감정들을 다 지고 갈 수가 없다. 그래서는 싸울 수가 없다. 때문에 그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억누르려 한다. 고향의 어머니를, 울음을 터뜨리는 연인을 등 뒤에 남겨 두려 한다. 그는 저 혼자 다치려 하는 선하고 캄캄한 젊은이다. 모든 것을 버려야 겨우 한 걸음 내디딜 가망이 서는 그의 삶은, 결국 그의 시대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이에게 사랑과 공동체에의 헌신 모두를 허용하지 않은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