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김영재 마음 연필을 날카롭게 깎지는 않아야겠다 끝이 너무 뾰쭉해서 글씨가 섬뜩하다 뭉툭한 연필심으로 마음이라 써본다 쓰면 쓸수록 연필심이 둥글어지고 마음도 밖으로 나와 백지 위를 구른다 아이들 신나게 차는 공처럼 대굴거린다 -김영재(1948~ ) /유재일연필심을 뾰족하게 깎아서 쓴 글..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2.27
웃는 당신-곽효환 웃는 당신 당신, 날 보고 웃네요 찻잔 둘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오래전에 그랬듯이 당신, 여전히 날 보고 웃네요 어느새 창밖에는 눈발 가득하고요 나는 아직 못한 말이 있는데 아니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두고 온 말들은 머릿속을 맴돌고 나는 이렇게 아픈데 여..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2.27
남향집-고영민 남향집 대문 옆에 아이들이 서 있다 조금 떨어져 방한모를 쓴 노인이 서 있다 노인 옆엔 지게가 비스듬히 서 있다 그 밑에 누렁이와 장화가 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 일제히 마늘밭을 쳐다보고 있다 반짝반짝 살비듬이 떨어지고 있다 남향집을 비추는 빛은 서 있는 아이..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2.27
노래/엄태원 노래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것 턱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놋세숫대야/김선태 놋세숫대야 아직도 고향집엔 놋세숫대야가 있다 늙수그레한 어머니처럼 홀로 남아 있다 물을 비우듯 식구들이 차례로 떠나고 시간은 곰삭아 파랗게 녹슬었다 어머니, 볏짚에 잿물 발라 오래도록 문지르면 다시 환하게 밝아오던 그때처럼 추억은 때로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하다 가만가..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아침 산책―메리 올리버 아침 산책―메리 올리버(미국·1935~ )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 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 말들. 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 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뱀은 뱅글뱅글 돌고 비버는 연못 위에서 꼬리를 친다.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황금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봄/이성부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길/류근 길 여섯 살 눈 내린 아침 개울가에서 죽은 채 발견된 늙은 개 한 마리 얼음장 앞에 공손히 귀를 베고 누워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소리를 견뎠을 저문 눈빛의 멀고 고요한 허공 사나흘 꿈쩍도 않고 물 한 모금 축이지 않고 혼자 앓다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개울가로 걸어간 개 발자국..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홍영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크고 무거운 돌 하나를 만났다 돌 속에서 사람을 보았다 돌 속에 갇힌 사람을 꺼내고 싶었다 끌과 정과 망치를 집어 들었다 돌에서 사람이 아닌 돌을 깎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손도 얼굴도 벌겋게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아버지의 쌀/우대식 아버지의 쌀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 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 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듯 죽음에 가깝다 맑은 물에 몇 번이고 씻다 보면 쌀뜨물도 맑아진다 석유곤로 위에서 냄비가 부르르 부르르 떨고 나면 흰 쌀밥이 된다 아버지는 밥을 푼다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 빛나는 밥..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