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 가는 길, 잠시/신용목 소사 가는 길, 잠시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국립중앙도서관/고영민 국립중앙도서관 허공에 매화가 왔다 그리고 산수유가 왔다 목련이 왔다 그것들은 어떤 표정도 없이 가만히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쭈욱 빼고 내려다보았다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매화가 먼저 가고 목련이 가고 산수유가 갔다 —고영민(1968~ ) 아랫녘엔 매화가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새우젓/윤후명 새우젓 새우젓의 새우 두 눈알 까맣게 맑아 하이얀 몸통에 바알간 꼬리 옛 어느 하루 맑게 돋아나게 하네 달밤이면 흰 새우, 그믐밤이면 붉은 새우 그게 새우잡이라고 배운 안산 사리포구 멀리 맑게 보이네 세상의 어떤 눈알보다도 까매서 무색한 죽음 지금은 사라진 사리포구 삶에 질려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반나절 봄/도광의 반나절 봄 소리, 파시, 미카 이름을 가진 기차 아지랑이 언덕 넘는 반나절 봄이 있다 KTX가 서울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해도 시간이 남는 반나절 봄이 있다 버들가지 물 위에 졸고, 풀밭에 늘펀히 앉아 쉬는 반나절 봄이 있다 고운 나이에 세상 등진 외사촌 동생 순자 생각나는 반나절 봄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이런 꽃/오태환 이런 꽃 순 허드레로 몸이 아픈 날 볕바른 데마다 에돌다가 에돌다가 빈 그릇 부시듯 피는 꽃 ―오태환(1960~ ) 딱히 어디랄 것 없이 무겁고 아픈 것, 그러니까 '허드레로' 아픈 것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리라. 그리운 이를 보지 못해 생긴 병이며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이가 있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4.01.16
나비물/임성구 나비물 김 나는 등허리에 무지개가 피었다 바가지 물 뿌리며 아내가 하는 말 "옴마야! 나비처럼 팔랑댄다" 마른 하루가 웃는다 마당에 먼지같이 바짝 말라버린 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쉬이 말 못 뱉는… "써언타 문디 가시내냐!" 내일 또 보자 등목무지개 ―임성구(1967~ ) *써언타 : '시원..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노래/엄원태 노래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것 턱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여름 과수원/장지성 여름 과수원 한밤의 과수원은 물 오른 젊음이다 서로 나눈 정분이 소(沼) 되어 더욱 깊은 바람도 향기로 오는가 숨다 들킨 입맞춤. 어느새 부푼 열매 잎잎으로 가슴 가려 휘어진 가지결에 주저리를 엮어놓고 한 마리 잠자리도 들여 그 음색을 듣고 있다. 낮이면 잠겨들다 밤이면 떠오르는 ..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이상하고 아름다운/강성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흔들리고 있다 그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금이 간 안경알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침대가 있다 그 옆으로 흘러내린 촛농으로 덮인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벽에 걸린 몇 년 전의 달력이, 마룻바닥 위 여행 가방이 입을 벌리고 옷..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여름의 일/나태주 여름의 일 골목길에서 만난 낯선 아이한테서 인사를 받았다 안녕!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하늘에게 구름에게 지나는 바람에게 울타리 꽃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 문간 밖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순한 얼굴의 개에게도 인사를 한다 너도 안녕! ―나태주(1945~ ) 때로는 작고 사소한 일이 우..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