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6.02
태백선 / 나태주 태백선 / 나태주 두고 온 것 없지만 무언가 두고 온 느낌 잃은 것 없지만 무언가 잃은 것 같은 느낌 두고 왔다면 마음을 두고 왔겠고 잃었다면 또한 마음을 잃었겠지 푸른 산 돌고 돌아 아스라이 높은 산 조팝나무 꽃 이팝나무 꽃 소복으로 피어서 흐느끼는 골짜기 골짜기 기다려줄 사람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4.21
등산/오세영 등산/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重量)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 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 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 보지도 않는다. 벼랑..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2.26
상행(上行)/김광규 상행(上行)/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2.26
토끼풀꽃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복효근 토끼풀꽃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복효근 낡은 결혼 시계가 멈추어 선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헛헛한 빈 손으로 돌아오는 길 요천수 고수부지에 들었어라 수면에 뜨는 저녁 노을은 턱없이 곱고 괜스레 가슴 먹먹할 때 토끼풀꽃 둘러 핀 풀밭에 나는 눕고 차라리 아내는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2.26
병든 서울-오장환 병든 서울/오장환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2.26
서시 / 윤동주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4.02.16
가재미1,2,3/ 문태준 가재미 1/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3.04.17
성묘(省墓) / 장윤우 (성신여대명예교수.시인) 성묘(省墓) / 장윤우 (성신여대명예교수.시인) 아픈 겨울을 떨칠 수 없어 산으로 향한다 경기도 화성(華城) 망망한 서해(西海)를 옆구리에 끼는 장전리 시화호를 내려보는 야트막한 산 동생들을 데리고 先山 골짜기를 오른다 거기 고요히 잠드신 부친과 모친의 숨결을 찾는다 하늘은 적막(..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3.04.03
뚜벅이 반추(反芻) 외4편 /장윤우 뚜벅이 반추(反芻) 외4편 1) 되새김질 장윤우 태여날 때부터 머슴꾼이다 늦가을 수소라서 어깨가 더욱 휘어지도록 70여년을 일해오면서 늙어가는 소가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소만 태형(笞刑)으로 감으며 인생을 되새김질할 따름이다. 커다란 눈망울에 맺히는 높은 하늘 구름 한번 처다보고 .. ♣ 詩그리고詩/한국명시 201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