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행(上行)/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 반달곰에게(1981)
[핵심 정리]
1. 갈래 : 서정시, 자유시
2. 성격 : 비판적, 현실 참여적, 반어적
3.어조 :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나타나는 반어적 어조
4.제재 : 1970년대 농촌의 광경과 근대화
5.주제 : 잘못된 근대화와 소시민적 삶에 대한 비판
*화자가 비판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
이 시의 화자는 상행선을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1970년대의 전시 행정적인 잘못된 (근대화)와 독재 정권 하에 언론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적) 삶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구성]
1- 5행 : 상행선 기차에서 발견한 자아의 비판 의식
6-11행 : 열차 안과 밖의 풍경 비판
12-19행 : 언론을 억압하는 현실 비판
20-29행 : 사고와 표현을 제한하는 현실 비판
[시어 및 시구 풀이]
* 낯선 얼굴 :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적 자아,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지닌 존재
*생각지 말아다오 : 반어법, 심층적으로는 ‘생각해다오’
*낯익은 얼굴 : 너,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일상에 안주하는 현실적 자아, 현실에 대해 순응적인 존재
*황혼 속에 ~ TV 안테나들 : 외형적 성장 위주의 획일적인 근대화에 비판적 인식이 심층에 깔려 있는 표현. 1970년대에 정부에서 시행한 ‘주택 개량 사업’을 염두에 둠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 왜곡된 근대화로 인한 농촌의 오염 문제 환기
*심야 방송이 ~ 전파 소리 : 현실에 대한 은밀한 비판의 소리
*확성기마다 ~얼마나 경쾌하냐 : 관 주도의 일방적 개방 , 성장 위주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
*생각 :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나 비판적 사고
*보다 긴 말 :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의 말
*너를 위하여 / 나를 위하여 : 자신의 위안만을 생각하는 소시민적 의식 비판
[감상]
이 시는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행태와 기차 밖에 존재하는 풍경을 대비시키고 있다. 기차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근대화가 가져 온 풍요에서 소외된 농민과 서민의 고통스런 현실이다. ‘농악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과 ‘오랫동안 가문 날씨’는 농민과 서민이 처한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비유적이고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시구인 것이다. 이에 비해 기차 안에 존재하는 것은 소시민 혹은 중산층의 삶이다. 즉, 이들은 근대화의 혜택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화자는 이들이 ‘근대화의 풍요롭고 힘찬 겉모습만을 보고 있으며, 농민과 서민의 소외되고 궁핍한 삶은 그들에게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의 화자는, 작중 청자(聽者)로 설정된 소시민 또는 중산층의 인물을 향하여 농민과 서민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은 그런 현실에 눈 감고 속물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 나를 위하여.‘라는 마지막 부분의 표현은, 이와 같은 비판이 시인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시인은 자신의 소시민적인 삶을 비판하며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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