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이윤학 저수지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손가락 체온계/이성자 손가락 체온계/이성자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프다 엄마가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펴서 내 겨드랑이로 쓱 밀어 넣는다. -어머! 열이 38도는 되겠어! 깜짝 놀라는 엄마 -에이, 엄마 손가락이 체온계야? 맞나 틀리나, 내기하자며 엄마가 진짜 체온계를 가져온다. 귀신같이 정말로 38도다. 우리 형..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하현(下弦)/정혜숙 하현(下弦) 머언 기별 같은 저물지 않는 이름 같은 외진 간이역의 늦게 핀 백일홍 같은 서늘한 한 줄 묘비명 하늘 난간흰 하현(下弦) ―정혜숙(1957~ ) /이철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의 풍요로움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명절 증후군' 등이 지면을 장식하면서부터 ..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가을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이인구 가을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구름 몇 점 입에 문 채로 푸른 하늘 등에 업고 바람처럼 시들거나 구겨지지 않는 노래 부르며 숲의 문 차례로 열어젖히고 끝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마음의 어둠 검은 밤처럼 던져 버리고 우수수 쏟아질 듯 열린 하늘벌 가득한 별..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작은 목숨 하나도/권영세 작은 목숨 하나도 방을 닦다가 본 작은 개미 한 마리 몸을 움츠리는 나를 보고 엄마는 걸레로 꾹 누르라고 하셨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느 틈에 나를 보았는지 그 작은 발걸음 잽싸게 달아나는 개미 나는 개미가 내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딴 곳으로 눈을 돌려 방을 닦았다 ―권영..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고욤나무 아래에서/이상문 고욤나무 아래에서 친구와 함께 고욤나무 아래에서 놀 때는 고욤 꽃이 피어도 고욤 열매가 열려도 쳐다볼 줄 모르더니 친구가 떠나버린 뒤에야 고욤나무를 쳐다보면서 고욤 단맛을 알게 된다 고욤 떫은맛도 알게 된다 ―이상문(1947~ ) 가을이어서 그럴까. 이 동시를 읽으면 들길에 서 있..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해당화/박흥종 해당화 가시덤불 그 속에서 야들야들한 태깔에 시름하듯 붉은 빛깔. 이 고운 꽃의 멋을 그 누가 알기나 할까? 깨끗이 씻어내어 얼굴 곱게 단장한다면 인간 세상에서 제일 가는 꽃이 되련만. 海棠花(해당화) 膩態愁紅荊棘裏 (이태수홍형극리) 此花風韻有誰知 (차화풍운유수지) 若敎洗..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기별이 닿는가/김소해 기별이 닿는가 네 별에 여직 못 닿은 부음의 기별 있어 광년(光年)을 헤아리며 자박자박 가고 있다 저 혼자 걷는 길이라 목선처럼 더디다 화석으로 남은 편지 또 그리 긴 문장이다 문장에 인(燐)불을 밝혀 낱낱이 읽을 동안 별똥별 아-그제서야 그 기별이 닿는가 ―김소해(1947~ ) '계절이 지..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바람의 씨/김재혁 바람의 씨 아주까리씨 하나를 입에 넣고 잘게 씹는다. 입에서 한 무더기 꽃이 피어난다. 입은 점점 더 커져 풀무가 된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생각이 피워 올리는 폭포, 한 톨의 아주까리씨가 풀무를 돌린다. 꽃의 너울 속으로 넘나드는 바람의 혼절한 모습, 지나온 역을 향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
외딴집/홍성운 외딴집 누가 살아서 지붕에 고추를 말리시나 큰길이 뚫리기 전, 아는 이도 없었을 흉년 든 어느 해인가 그냥 밭에 눌러앉았을 요즘 들어 울담에는 애호박도 보인다 털다 만 깻단들이 마당에 수북한 날 “계세요?” “누구 계세요?” 인사라도 하고 싶다 정작 반세기 동안 이웃 없이 살아.. 가슴으로 읽는 詩 201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