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항구에서/문태준 아침 항구에서 바다가 아침에 내게 갈치 상자를 건네주었네. 해풍에 그을린 어부들의 굵은 팔뚝으로. 미로를 헤엄치는 외롭고 긴 영혼을. 빛의 날카로운 이빨을. 한번도 건너지 못한 멀고 먼 곳을. 깊은 풍랑을. 갈치 상자만한 은빛 가슴을. 푸른 바다가 검은 내게 배를 대고서 —문태..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서울·1/서벌 서울·1 내 오늘 서울에 와 만 평(萬坪)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서벌(1939~2005) 서울은 한국 사회의 축도(縮圖)이자 상징이다. 중심의 힘은 세고 길었다. 서울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히고 안절부절못한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素饌(소찬)/박목월 素饌(소찬)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무침에 新苔(신태). 미나리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福 걤(복록)을. 가난한 자의 盛饌(성찬)을. 默禱(묵도)를 드리고 젓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시대를 한탄한다[歎時]/서지 시대를 한탄한다[歎時] 생김새는 짐승이나 마음은 사람다운 자는 먼 옛날 성인 가운데 많고 形獸心人多古聖(형수심인다고성) 생김새는 사람다우나 마음은 짐승인 자는 오늘날 현자가 다 여기에 속한다. 形人心獸盡今賢(형인심수진금현) 서울 길을 왁자하게 헤치고 가는 의관이 화려한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나비/김사인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송아지/강소천 송아지에 얽힌 추억은 늘 애틋하다. 어미 소의 젖이 퉁퉁 붇기 시작하면 송아지를 낳았다. 갓 낳은 송아지가 사랑스러워 어미 소는 젖은 털을 혀로 핥아주고, 송아지는 머리로 어미 소의 젖을 쿵쿵 받으며 재롱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미 소가 팔려가던 날, 어미 소 눈에서 그렁거리던..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초록 기쁨 ―봄 숲에서/정현종 초록 기쁨 ―봄 숲에서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신전)이다 해여, 푸른 ..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꽃 울타리/윤석중 꽃 울타리 앞집과 뒷집 새에 꽃 울타리 앞집 애가 노래하네. "꽃들아 꽃들아 이쪽 보고 피거라." 뒷집 애가 노래하네. "꽃들아 꽃들아 이쪽 보고 피거라." 양쪽 집에서 다 잘 보이라고 하늘을 쳐다보고 피었다네. 앞집과 뒷집 새에 꽃 울타리 ―윤석중(1911~2003) 어른들은 어린 시절 누구나 윤..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그 문전(門前)/김상옥 그 문전(門前)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을 두루 둘러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줄 손이 없어 그 문전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김상옥(1920~2004) 봄의 문전이다. 새 문 여는 소리들로 온 거리가 분주하다. 제 문전을 활짝 열듯 꽃들이 곧 만개(滿開)할 것이다. 시새운 바..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
가정식 백반/윤제림 가정식 백반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윤제림(1960~ ) 아직 추위가 가지 않은 새벽, 사내들이 밀어닥친다. 봄처럼 밀어.. 가슴으로 읽는 詩 201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