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나비/김사인

시인 최주식 2012. 3. 23. 22:47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김사인(1956~ )

불현듯 마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아마 공중을 절뚝였으리. 아이 하나 툇마루 끝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꽁보리밥을 뜨다가 나비를 본다. 울어야 하나 참아야 하나. 망설일 틈도 없이 삽시간에 아이를 둘러싸는 천애(天涯). 나비는 아이의 턱 밑에 더께로 굳은, 평생치의 울음이 애닯아 마당을 몇 바퀴 더 절뚝절뚝 날다가 사라진다. 아버지는 나비가 되어 이렇게 다녀가고 어머니는 새마을 취로사업이라도 나갔을지 모르겠다.

불과 한 세대 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저 풍경은 성스러운가 부끄러운가. 저 풍경은 역사에 넣어야 하나 외면해야 하나. 그 앞에 무릎 꿇고 싶은 사람. 오는 사월 초순에 만나고 싶다. ―시는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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