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상 작품-봄은 비를 타고서
오고있다
봄이 비를 타고서
가녀리나 힘찬 빗방울로
아파트 담 옆에 무심코 서있는
라일락 뿌리를 잘게 두드리며
멈추어 무뎌진 내 이마를
부드럽고 날렵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풍성히 적시고 있다
잠에서 꺁 나는 수천의 나비가 되어
공중에 푸르게 날아올라 날개에 묻은
어제의 습기를 햇빛에 털어 말린다
신문배달 소년의 무거운 팔 위
때 늦은 경비 아저씨의 피곤한 새벽잠 곁에
봄은 잃었던 판도라의 상자 하나씩 몰래 놓아두고
멀리서부터 조여매고 왔던
운동화 끈을 풀어놓고 비를 따라간다
마음껏 춤추며 놀다가
새롭게 깃을 갖추는 나에게 손 흔들며
봄이 가고 있다
비를 타고서
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줍니다. 그것이 '수천의 나비', '날개', '햇빛', '조여맸던 끈은 풀다', '새로운 깃'으로 나타났구요.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시어들이 너무 평이하고 낡았군요.
시어의 의미가 신선할 때 독자들은 감동을 받게되죠.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첫행이 도치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효과가 별로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봄비가 힘찬 빗방울로 내리고 있는데 나비의 등장은 왠지 억지처럼보이지요. 또한 어제의 습기를 햇빛에 말린다는 것도 논리상 맞지 않지요. 물론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허무맹랑한 추상을 나열하는 것이 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지적하는 바 입니다.
'아파트 담 옆에 무심코 서있는'은 앞뒤 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긴장을 흐트려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멈추어', '잠에서 깬'은 없는 편이 차라리 낫겠네요. 만약 '잠에서 깬'이 새로운 각성을 뜻한다면 앞뒤에서 받쳐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연의 경우 1연의 이야기에서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주제를 이끌어갈 힘이 부족한 경우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나열하게 됩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이 아는 암호를 써 놓고 흐뭇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초심자가 버려야할 습관입니다.
도입부에서 '봄이 오고 있다'고 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봄이 가고 있다'고 함으로써 한 계절을 대상으로 삼아버려 시간대의 폭이 너무 크게 나타났군요. 시의 끝 부분은 중요한 만큼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고려하고 평이한 제목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정된 시-우화(羽化)
봄이
비를 타고 오고 있다
가녀리나 힘찬 빗방울로
무디어진 내 이마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오랜 잠을 깨워 놓는다
라일락 뿌리,
목련의 푸른 줄기를 두드리는
비를 따라
한겨울 내내 조여매었던
내 마음의 고치실을 풀어낸다
봄 햇살이 반짝이고
나는 새롭게 깃을 갖춘다
공중에 푸르게 날아올라
날개에 묻은 습기를 털어낸다
수천 수만의 날개들이
봄의 빛깔로 물들어
햇살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다.
7.대상 시 -가을비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약속없는 빗줄기를 만나면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빗길 저 끝으로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가 서 계십니다
고불고불 골목마다
이름없는 들풀이 비를 맞습니다
명분 세운 고목나무도
비에 젖습니다
이리저리 이럭저럭 함께 왔으니
스스로 대견하여 손길이 다정합니다
비에 젖은 불빛이 말을 시작하자
가장들은 젖은 어깨 위에
고단한 생활을 올려놓고 바삐 갑니다
나는 맨 몸을 다시 걸으며
그거려니 하고
초라한 삶을 웃어봅니다.
시는 매 행이 문장으로는 독립적이되 의미상으로는 연결이 되어야만 합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는 경향이 있어 자신이 본 것, 느낀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멋진 문장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졌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는지가 시의 성패를 가늠합니다.
위 대상 시는 소재들이 연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비오는 저녁 풍경을 단순히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이야기만 벌려놓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몰아가는 힘이 부족해 보입니다. 글이란 초점이 뚜렷해야 합니다.
지은이가 비 오는 저녁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걷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앞의 소재들 -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이름없는 들풀","명분세운 고목나무","가장들의 고단한 생활" - 은 모두 자신과 연관된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시는 주위 풍경의 감상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 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이름없는 들풀","명분세운 고목나무","초라한 삶"은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표현들이다. 낡은 언어끼리, 혹은 의미없이 갖다 붙인 언어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독자들이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은 자신도 그러한 체험이나 느낌을 가졌을 때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구잡이로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고불고불 골목마다/이름없는 들풀이 비를 맞습니다" 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골목길에 들풀이 자라기는 힘들겠죠.
"이리저리 이럭저럭 함께 왔으니/스스로 대견하여 손길이 다정합니다"와 "비에 젖은 불빛이 말을 시작하자"의 화자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죠.
"이리저리 이럭저럭"은 불필요하게 중첩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연관성과 시어의 적절성을 고려하여 고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을비-(수정된 시)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빗줄기를 만나면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빗길 저 끝 골목마다
이름없는 풀들이면 나무들이 비에 젖어듭니다
비에 젖은 불빛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고단한 어깨 위에
초라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걸어가며
삶이란 다 그러려니
가볍게 웃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