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눈 오는 저녁의 시 -김일연(1955~ )

시인 최주식 2014. 2. 20. 21:32

 

눈 오는 저녁의 시 -김일연(1955~ )

 

어둠에 손을 씻던 맑은 날들을 길어

내 언제 저렇도록
맹목을 위하여만

저무는 너의 유리창에 부서질 수 있을까

무섭지도 않느냐 어리고 가벼운 것이

내 정녕 어둠 속에
깨끗한 한 줄 시로만

즐겁게 뛰어내리며 무너질 수 있을까

어둑한 저녁에 내리는 하얀 눈발처럼 참 깨끗하고 명징한 시이다. 시조라는 단아한 구조에 담긴 그리움과 깨끗한 의지가 절명시(絶命詩)처럼 순정하다. 우린 언제 한번 저 내리는 눈발처럼 맹목으로 하얗게 스러지는 순정인 적 있었던가. 시와 시조를 함께 읽고 골라 평하다 보면 시조 쪽에서 좋은 시가 많이 눈에 들어온다. 3장6구의 안정된 구조와 짧은 길이의 정형(定型), 우리말에서 자연스레 울려나오는 운율로 해 다시금 보고 읊조리게 하는 게 시조이다. 무엇보다 정형의 그 정해진 틀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을 개결하게 담아내고 있는 현대시 한 장르가 시조이다. 급변하는 첨단문명의 속도 따라가기 힘들어서인가. 자아분열이 장황하게 노출되는 자유시들 속에서 민족의 정통시가인 시조는 ‘정녕 어둠 속에 깨끗한 한 줄 시’로 오늘도 이리 정갈하게 쓰이며 현대시를 이끌고 있는 것을. <이경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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