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야한 여자' 가 좋다
박 노 해
수배생활 4년만에 '화려한 외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동지들을 만나러 머언 지방까지 가는 날입니다. 저를 안전하게 데려다 줄 안내자 동지와의 약속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마치 국민 학교 시절에 소풍 가는 것처럼 흥분되어서인지, 밤을 꼬박 세우고도 너무 서둘러서 나왔나봅니다.
아무렴요, 흥분할 수 밖에요. 85년도에 공장에서 마지막 파업투쟁을 하고 피신해 나오면서, '다시는 정든 이 공장에 임금노예로는 돌아오지 않으리! 승리의 '노동해방' 깃발을 들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피눈물로 맹세하며 수배생활을 시작한 지가 어언 4년이니까요.
그 4년 동안에 애타게 그리운 동지들은 물론이고 심장이 펄펄 뛰는 생생한 투쟁현장,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과도 담을 쌓고 숨어 일해야 했으니까요. 수차례나 아슬아슬하게 적의 침탈의 손길을 피하며, 단 한시도 면도날 같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살아왔으니까요. 수배자는 잡히는 순간 십중팔구는 철규와 같은 죽음이 예고되어 있으니까요. 함부로 어디건 나다닐 수가 없었지요.
아, 그런데 4년 만에, 87대파업 이후 대중적 계급투쟁의 현장에서 자라온 우리 노동자 동지들을 만나러 가는 건데, 제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직은 약속시간은 한 시간 하고도 45분이나 남았습니다.
주변의 '공기'가 좋지 않은 듯 싶어서 길 건너에 보이는 아주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안전하게 기다릴 겸 떠오른 단상을 메모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아! 정말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호화스럽고 분위 있는 레스토랑이었습니다. 홀 가운데 실내분수에선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고급원목과 대리석으로 원시적 분위기를 연출한 벽과 자줏빛 카페트, 마야문명을 상징하는 질박한 토기장식, 푸르른 실내화초들, 거기다 잠자리 속날개 같은 쌔하얀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열창하고 있었읍니다.
잠시 눈동자를 표시 안 나게 레이다처럼 팽글팽글 돌리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키고서 주위를 둘러볼 즈음, 어머! 제 앞에는 화려하다 못해 '야한 여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유리글라스를 들고 연한 황금색 와인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투명한 유리글라스를 잡은 하이얀 손엔 빨강 파랑 자주 검정 색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길다란 손톱이 돋보였습니다. 저는 일순간 경계하다가 서서히 긴장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안 보는 척하면서 그녀를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약간 긴 머리는 최신의 헤어스타일 퍼머를 했구요, 귀에는 커다란 금속성 귀고리를 달았구요, 목에도 은은한 빛이 나는 진주목걸이인 듯한 걸 걸었구요, 얼굴에는 진하게 화장을 했구요, 입술은 진한 분홍빛 루즈를 발랐구요, 어깨와 히프를 잔뜩 부풀린 현란한 색상과 무늬의 원피스가 아마도 '임마누엘 옹가로' 같았구요, 숨막힐 듯 곧게 뻗은 각선미 아래의 끝이 뾰쪽하고 높은 하이힐은 짙은 초록이었어요.
그녀는 술잔을 들고 간간이 그 색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 달린 손으로 너울대는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곤 했어요.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부룩 쉴즈의 섹시한 자태처럼요. 한마디로 화려한 미녀라고 하기엔 그렇고, 지적인 미녀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고상하고 기품있다기에도 그렇고, '야한 여자!' 그래 맞아, 요즘 유행하는 '야한 여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야한 여자'를 바라보던 저는 문득 순이가 떠올랐습니다. 원단을 누르느라 손톱이 뭉툭하게 다 닳아지고 얼마 전엔 검지손가락에 미싱바늘이 뚫고 들어가 마이신을 먹고 끙끙대던 순이의 모습이요.
잔업하랴 노조활동하랴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쓰러져 자느라 머리도 제대로 못 감는 순이의 모습이요. 빨간 머리띠를 동여매고 힘찬 손을 내어뻗던 멋진 모습이요.
저는 뒤에 올 손님 있느냐는 웨이터의 주문요청에 혼자라고 대답하며 쥬스를 한잔 시켰지요. 그런데 잠시 후, 세상에! 그녀는 웨이터를 부르더니 저에게 합석을 요청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지며 우물쭈물하다가, 어느새 제 테이블 앞에 서서 글라스 잔을 쥔 채 무릎을 약간 굽히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닥하며 인사를 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녀를 가까이서 유심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은 앞에 앉은 그 여자를 '상에서 하로, 하에서 상으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목 위 가슴 허리 하체 다리로 부분씩 끊어서, 주목할 만한 곳은 중첩해서, 군대시절의 '보초일반 수칙'의 경계요령에 입각하야 살피기 시작하였지요. 제 눈을 잡아끄는 것은 단연 그 길고 형형색색의 컬러로 칠해진 손톱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저렇게 긴 손톱을 갖고 밥은 어떻게 먹고 빨래는 어떻게 하며 화장실에선 어떻게 하고 머리는 어떻게 감누? 요리는 어떻게 하고 설사 사무직이라 해도 컴퓨터 자판은 어찌 두들기누? 정말 걱정되기 짝이 없구나. 땀구멍을 다 막아버릴 정도의 화장은 또 어떻구요. 땀이 나면 어쩌지? 눈물은 어떻게 흘리지? 짙은 입술루즈 때문에 음식은 어찌 묵노? 저 높은 하이힐을 신고 가다 자빠지면 우짜노? 가슴과 엉덩이에 액센트를 주고자 치마끝을 좁게 만든 원피스를 입고서 계단이나 횡단보도에선 어찌 달리누? 저의 호기심과 상상은 점점 근심과 걱정과 동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만 있자, 저 여자의 화장과 옷과 저 야한 손톱을 위해 파출부 아줌마로부터 시작해서 미용실, 의상실, 제화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중을 들고 모셔야만 하지? 그 돈은 누가? 저 여자는 내 앞에서, 남자들 앞에서 잠시 앉아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저렇게 야하게 치장했을까? 아마 저런 정도의 정교한 화장은 두시간? 혹은 세 시간? 저런 손톱은 아마 하루에 한 시간? 저 머리는 30분 이상은 족히 걸릴걸? 그러다가 나는 마치 한 마리 원숭이를 앞에 둔 양 하나하나 다시 뜯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앞에 두고 변증법적인 사유방법으로 상향과 하향, 분석과 종합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야하디야해빠진 '야한 여자'였습니다. 자신의 노동과 시간만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과 시간을 뜯어다가 '야해진' 여자였습니다.
아, 그러나 그녀의 외모는 그녀가 하는 말에 비하면 차라리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게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랑은 관능적 욕망 그 차체일 뿐이에요. 정신적 사랑이니 하는 것은 한낱 헛된 망상일 뿐이지요. 사랑은 육체적 욕망이고 섹스 자체입니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어렵고 고달플지라도 본능은 그 작동을 멈추지 않는 것 아녜요? 행복은 오직 관능적 쾌감에서 오지요."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야한 여자'가 나는 좋아요. 꼭 금이나 다이나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고리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워요? 짙게 화장한 얼굴 아래에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나지 않아요? 화장을 하며 아무것도 감추려 하지 않는 자신감에 찬 적나라한 표정에서 여인의 본능은 빛처럼 흐르고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더 호소적이고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게 아녜요?"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당당한 쾌락추구에 기초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그래 맞아! 그러면 그렇지. 그렇고말고!
(위의 인용부 안의 글은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서 따온 것이며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이다.)
역시 그녀는 '야한 여자'였습니다. 외모만 야한 것이 아니고 그 외모에 걸맞는 야한 속셈, 야한 철학을 부동의 확신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씀대로라면 이 '야한 여자'는 하루 종일 섹스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에 앉아 있는 저에 대해서도 '저 녀석은 물건이 얼마만 할까? 테크닉은 좋을까? 쎌까?'만 생각할 것입니다.
오오, 하늘이시여! 저는 당당한 듯 똥폼을 잡고 앉아 귀신 성교하는 얘기나 지껄이는 야한 여자 앞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였습니다. 그 야한 여자는 깜짝 놀라며 저를 앉히려 하였습니다. 저는 이때 나직히 그러나 속사포처럼 그 여자의 귓전에 대고 한말씀 이야기를 해주었던 모양입니다. 제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협오감과 울분을 더이상 억제할 길이 없었거든요. 제 등에다 대고 "이 새꺄" 비명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의 야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저는 울면서 걸어 나왔습니다. 아마도 지난 겨울부터 건강을 상해버려 심약해진 탓인지, 이따위 작은 충격에도 눈물이 흐르나 봅니다.
야한 여자를 보면
텔레비에서 거리에서
야한 여자들을 보면
나는 눈물이 난다
주렁주렁 귀고리에 분 바른 화장에
긴 손톱에 화려한 의상에
지워져버린 그녀의 존재,
장식하지 않으면 존재조차 없는
야한 여자들을 생각하며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운다
관능과 쾌락의 기쁨과
섹스의 오르가즘만으로
인생을 생각하며 상대를 바라보며
날마다 하많은 관심과 시간을
화장과 장식에 쏟아넣어야 하는
날마다 허망하게 자신을 죽여가며
희망이 사라진 성냥불의 순간 앞에
불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야한 여자의 슬픈 운명을
나는 서러움에 북받쳐 운다
야한 여자를 보며
나는 구토를 한다
우욱우욱 구토를 한다
자본이 없기에 팔려나와
영등포 뒷골목의 유리상자 안에
무리지어 진열된 야한 여자건
새벽이면 쓰린 속을 부등켜안고
벌거벗은 몸매로 해장국을 퍼먹는
역 앞에 방석집 야한 여자건
팔려가기 위해 포장된 야한 여자를 보면
싸아한 눈물 끝에 구토가 난다
압구정동 거리나 백화점에 쇼핑 나온
자본을, 남의 노동을 덕지덕지 바른
고상하게 야한 여자들을 보면
울컥울컥 구토가 난다
구토 끝에 눈물이 난다
야한 여자를 보며
나는 치를 떨며 운다
날마다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기에
야하게 상품으로 꾸며야 하는
몸밖에 없어 몸마저 야하게
상품으로 포장되어야 하는 야한 여자를 보며
나는 나는 치를 떨며 운다
값비싼 장식으로 부유한 껍데기로
손톱을 기르고 화장을 하는
야한 여자 하나 가꾸는데 드는 노동,
공장의 수백 수천의 순이를 생각하며
치떨며 치를 떨며 나는 운다
야한 상품으로 야한 물건으로
인간이 성이 아름다움이 팔려가는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저주받은 땅에서
야한 여자 야한 세상 야한 세계를 보며
나는 야수처럼 치떨며 치를 떨며
차가운 눈물로 운다 싸늘한 눈물로 운다
저는 그렇게 울며 걸었습니다. 아차!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발을 잽싸게 놀렸습니다. 잔뜩 긴장하며 저를 안내할 여성동지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하늘색 휴지를 들고 서 있기로 했지, 그 여성 동지는 장미꽃을 들고 온다고 했지, 서로의 연결암구호는 '극장, 예매'로 하기로 했지, 저는 빨리 다시 한번 확인하며 약속장소 주변으로 가서 주위의 여자들을 응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단 한번의 임무수행을 위하여 만나기 때문이지요.
아! 저 여자인 것 같다. 노동자처럼 소박한 얼굴과 용모하며, 운동하는 사람답게 형형한 눈매가 저 여자다! 저는 천천히 그 여자 주변으로 가서 코를 풀듯이 제 신호표시로 정해진 하늘색 휴지를 꺼내들었습니다. 아 그런데도 이 여자는 흘깃 보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잘못 짚었나?
다시 긴장된 속에서 몇분이 흘렀습니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나? 저 여자다! 헛다리를 짚다가 어느새 시간은 약속시간보다 10분이 지나 있었습니다. 이제 5분만 더 지나면 장소를 이동하여 제2의 비선장소로 (첫번째 약속이 어긋났을 경우 미리 정해둔 제2의 장소) 전화를 때려야만 할 상황입니다. 저는 긴장 속에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40대 남자가 셋, 30대가 둘, 차림도 수상하고, 주변공기가 무척 좋지 않았기에 마악 문을 나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였습니다.
아! 저 여자다!
장미꽃을 들고 다급히 저를 향해 걸어오는 여자. 그런데,
아앗! 저럴 수가!
한여름인데 새까만 원피스에다, 긴 퍼머머리를 너풀거리며, 얼굴은 분을 하얗게 바른 채, 입술엔 새빨간 루즈를 바르고, 손톱엔 자줏빛 매니큐어를 칠하고, 분홍색 뾰쪽한 하이힐을 신고서, 살랑살랑 야하게 히프를 흔들며 다가오는 여자! 또다시 '야한 여자'였습니다.
간단히 암구호를 확인했습니다. 저와 만나기로 한 여성동지가 분명했습니다. 서로의 신분이 확인되자마자 그 '야한 여자'는 제가 수년간 살아온 연인인듯이 차악 팔짱을 끼며 "조심하세욧." 나직이 말하며 걸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가슴과 머리를 기대오면서 "주변이 좋지 않은 듯하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마자 택시를 잡지요." 그녀는 빠르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서로의 신원을 암기하며 우리는 준비해 둔대로 신혼부부로 이빨맞추기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로 향하는 차를 탔습니다. 그녀는 차 안에서 화장으로 갑갑하고 따가운 피부의 고통을 살며시 호소해왔습니다. 길게 단 속눈썹과 마스카라 때문에 연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습니다. 검문소가 가까워오면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고선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사이처럼 야한 교태를 부려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견스럽고 기특하여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마지막 검문을 통과하고 그녀에게 잠시 과거의 활동경험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과거 70년대에 제가 공장 다닐 때 노조결성에 관여한 적 있는 ○○방직 출신 여성 노동운동가였습니다.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그 어성 동지도 놀라며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저는 그 공장의 정원수하며 공장건물과 기숙사 구조까지 빠꼼하니까요.
그녀는 이 무미건조하고 철의 규율로 꽉 짜여진 생활, 전문분업적 체계로 앙상한 힘겨운 비밀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하루생활은 놀라울만치 단순하고 기능적인 일의 반복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수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조합활동가에서 전위활동가로 훌륭히 단련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감회도 새롭고 해서 선배로서의 이런저런 당부와 격려의 말을 성심껏 하였지요. 그녀는 진중하게 가슴 깊이 새기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녀의 안내 임무도 끝났습니다. 이제 다섯 시간 동안 오누이처럼 정들었던 그녀와 나도 헤어져야 합니다.
아참, 식사를 하고 올라가야지요? 식사는 어떻게?
그러자 그 여성동지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용기를 냈다는 듯이 "실은요, 요즘 재정사정이 문제가 생겨서요, 일주일째 라면 땜질이에요." 그럼 돌아갈 차비는? "차비는 되는데요, 식사할 여유는 안돼요."
아! 어쩐지. 아까 오던 중에 고속버스가 설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가며 배가 좋지 않은 표정이더라니! 일주일 동안 밥도 못 먹고 살았구나. 이제 보니 화장으로 가려져서 안 보이던 얼굴색이 창백하고 찌들어 있었습니다. 야하게 치장된 가녀린 몸매는 무척 병약해 보였습니다. 그 힘든 긴장과 무미건조한 비밀활동 속에서 일주일 동안 밥도 못 먹었을 정도이니. 저는 평소와 달리 깜박 무심한 저의 무신경이 그렇게 부끄럽고 화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성동지와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습니다. 허겁지겁 진짜 '야(野)하게' 밥 두 공기를 먹어치우는 그녀를 보며 코허리가 시큰해졌습니다.
저도 돈이 충분치 않아 5천원을 한사코 핸드백에 넣어주고서 식당에서 일어섰습니다. 자, 이제 작별의 시간입니다.
"동지, 안전하게 여기까지 수행해주어 감사하오. 건강하시오. 힘겨워도 동지가 버티고 선 최전선의 진지를 굳게 지켜냅시다. 안녕, 동지." 저는 목메인 인사를 나눴지요. 그 야한 모습을 한 여성동지도 잠시 눈물을 글썽이며 "빨리 건강 회복하시고, 이번 모임에서 너무 건강 무리 마세요. 잡히시면 안돼요. 절대 잡히지 말고 건강하셔야 해요." 어느새 눈물을 비오듯 쏟으면서 서로 자꾸만 먼저 가라고 손짓했지요.
아 저는 처음 만날 때의 야한 모습 때문에 무의식중에 거부감이 들었던 '야한' 그 여성동지의 모습이 순간, 숨막히도록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덕지덕지 바른 화장과 쌔빨간 루즈와 시커먼 원피스와 어지럽게 볶은 머리다발과 길게 기른 자줏빛 손톱까지도 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 우리 이 척박한 남한땅에서 노동해방의 씨를 뿌려갑시다. 혹독한 탄압을 뚫고서도 끝내 깨지지 않을 조직을 구축하여 노동해방의 그날까지 진군합시다. 나도 절대 잡히지 않고 살아서 당신을 보리라. 장합니다, 동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를 깨물며 다짐하는 제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노동해방을 위하여,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비밀활동을 위하여, 한치의 오차 없는 임무수행을 위하여,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비밀활동을 위하여, 야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살아가는 그 야한 여성동지의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성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저 어린 나이에 항시 긴장에 쫓기고 밥조차 굶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저토록 의연하게 투쟁하는 동지를 떠나보내며 제 눈에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 오늘 나는 '야한 여자' 때문에 계속 우는구나!
그래, 나도 야한 여자가 좋다!
인간을 상품화시키고, 성을 상품화시키고, 온 세상 가치잇는 모든 것을 야하게 상품화시키는 이 치떨리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체계', 이 더럽고 추악한 '야한 세상'을 뒤엎고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던 사랑스런 우리 여성 동지!
'야한' 우리 여성동지 만세!
나도 '야한 여자'가 좋다!
<창비시선 112 「박노해 시집」 "참된 시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