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송 동시 - 제 38 편] 구슬비/ 권오순
- 권 오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 구절마다 '송송송' - 권 오 순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 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 ▲ 일러스트=윤종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 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었다. 몸이 불편한 그녀가 택한 길은 시를 쓰는 것. 1933년 《어린이》지에 〈하늘과 바다〉가 입선되기까지 그녀는 학교에 가지 않은 채 혼자 집에서 창작에 전념한다. 1937년 《카톨릭소년》에 발표된 이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이 시는 그 과정의 산물이다.
비가 내린다. 싸리잎에도, 거미줄에도, 풀잎에도, 또 꽃잎에도. 이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는 소낙비도 아니고, 감질나게 내려앉는 보슬비도 아니다. 그것은 '포슬포슬' 내린다. 비 내리는 바깥을 마음껏 돌아다녀보지 못한 소녀가 그 비를 바라본다. 소녀는 비를 맞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소녀에게 비는 다만 영롱한 구슬처럼 반짝일 뿐이다. 비는 '송송송' 내리고 '솔솔솔' 맺힌다.
권오순은 이 시를 통해 우리말 형용어의 외연이 얼마나 넓은지 그 스펙트럼을 화려하게 보여주었다. 싸리잎 위로 비는 '송알송알' 내리고, 거미줄에 비는 '조롱조롱' 맺힌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우리말의 ㅇ과 ㄹ의 '흘러내리고 튀어 오르는' 감각을 극도로 활용한 이 의태어들은 구슬비를 수식하는 형용어로 모자람이 없다. 이 말들이 있는 한 우리말은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고 싶은 보물과 같다.
시인이 우리말의 정부(政府)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이야기일까. "꽃바구니에 담아/ 창가에/ 걸어두고 싶다// 수정 쟁반에/ 또그르르…/ 굴려 보고 싶다// 옥항아리에 꽂으면/ 하이얀 방울 꽃내음/ 퐁퐁 솟겠다."(〈봄 아침 멧새소리〉) 청각을 또 다른 감각으로 재현하는 권오순의 재능은 이 시에서도 돋보인다. 봄날 아침의 멧새소리는 꽃바구니와 수정 쟁반, 그리고 옥항아리와 만나 '퐁퐁' 솟아오르는 '꽃내음'이 된다. '소리'는 보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급기야 냄새로 전환되기까지 한다.
이런 감각은 평생 '소녀'로 살다간 자의 것이다. 해방이 된 뒤 단독 월남한 권오순은 재속수녀가 되어 성당에서 세운 고아원의 보모로 봉사하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그녀에게 우리가 보인 관심은 충주호 부근의 시비뿐이다. 외롭고 가난한 그녀가 그토록 맑고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시의 나라의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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