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詩

제14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시인 최주식 2010. 1. 16. 21:23

제14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살아 있는 공 * 외 4편 / 임창아


 

셔틀콕은 위에서 노는 버릇이 있다 자고로
위에서만 노는 것들은 꼭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실은 그게 아니라
셔틀콕은 그저 선 하나 긋기 위해 분주했을 뿐, 본래
하나였던 이쪽저쪽 네트가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선 하나 위해 팔매질 수십 번 했고
공 앞에 수없이 무릎을 꿇었다 또
허공은 얼마나 아팠겠으며
바닥 치는 공은 얼마나 민망했겠는가
죽어가는 공으로 곡선은 그을 수 있지만
게임에서 이기려면 곡선으로는 약하다
독 오른 꽃뱀처럼 아가리 벌려 날아오는 공
살아 있는 상태로 때려잡으려면
바닥을 차고 올라 예각으로 내려쳐야 한다 하지만
승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쪽과 저쪽 이은 공이 선을 이루고
그 선이 나와 만나 면을 이룰 때,
비로소 땀도 맘놓고 흐른다

 

 

 

어떤 일의 순서 / 임창아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
우리 집 수소 교미 한 번 붙인 돈은
자취하던 내 한 달 생활비였다
덤으로 나는
남녀관계와 성교육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눈 뜨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귀하신 수컷은 제법
비싸게 놀 줄 알았다
암컷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공연히 꼬리 흔들어 쇠파리를 쫓거나
엉덩이 슬슬 피해 가며,
음부가 더부룩한 암컷 몸 달군다
그러다 어지간하다 싶을 때 한순간
사정없이 올라타는 수컷,
9회 말 끝내기 안타처럼
한 방에 해결하는 그 저력,
놀란 암컷은 후들거리는 다리 사이로
염치없이 질금질금 물똥 싸제끼지만
절정은 언제나 너무 짧다
그처럼 어떤 일에도 순서는 있는 법,
사정 끝내고 암컷 골고루 핥아주는
수컷의 신사적 마무리까지
저 말없음의 예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된 시 / 임창아

 

오랫동안 시를 썼다
시의 수명은 대체로 짧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한 구절을 위해 낭비한 종이들이 한심하게 책상을 점령하였다
그래도 좋았다
방탕하고 음탕한 낱말들이 좋았다
짝사랑이어도 나는 나를 용서한다 온종일
말꼬리나 잡고 늘어져도 일생을 바칠 만한 놀이
라 생각했다 완전하지 못한
삐거덕거리는 한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만치
화려한 수식어들이 손짓을 한다
입 없는 화자가 구시렁구시렁
문장과 문장 사이 막다른 골목이 나를 유혹한다
속이 울렁거린다 저 구불구불한 리듬을 타고
가자 내 유일한 파라다이스이자 아름다운 감옥으로,
그래도 좋았다
흥청망청한 낱말을 밟으며 나는 오래 늙어 갈 것이다
생면부지 낱말들이 정면으로 와도
비겁하게 고개 따위 숙이지 않겠다
한 호흡 크게 하고 몸을 낮추었다 태산처럼 높이
낯익은 문장이 걸려 있다 마음은
벌써 공중동작에 들었는데
자판 위의 사정은 여전히 도움닫기다
내 것 아닌 것은 항상 그리운 법
한 문장이 그리웠다
몸살나게 지독한 열병이었다 그러다가
괜찮네, 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나는 선택된 시가 되었다

 

 

 

주름잡던 시절 / 임창아

 

주름의 예리한 날에 한번 맛들이면
자주 구겨지는 자존심은 일찍 버려야 한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주니어 잡지 표지모델로
주름잡던 혜정이도 있었지만
문학상 휩쓸던 순정이나
약국집 딸, 하얀 얼굴의 현자가 제일 부러웠다
이불 밑에 주름치마 깔고 자던 언니처럼
나는 기껏 교복 주름이나 잡겠다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잠이라도 반듯하게 자야 했다


어차피 생은 똑바로 주름잡기 위해
몸 전체를 기울이는 것이지만
이중주름처럼 난감할 때도 있다


서울로 상경한 혜정인 스무 살에 애엄마가 되었고
화장 떡칠하고 다니는 현자는 가수 매니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떡대 좋은 순정인
다섯 살 아들 하나 두고
저 세상으로 갔다


오늘은 동갑내기 이종사촌 결혼식
고등학교 때 변변히 이름 한 번 못 불리던
그 녀석
고린내 나는 골방에만 처박혀 살더니
다 늦게 사법시험 붙어 장가가는 날
활짝 핀 이마에 골 깊은 주름살,
저 주름 잡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을까
이젠 내 사촌도 느지막이
주름 꽤나 잡고 살겠다

 

 


나를 함부로 탐독하지 마라 / 임창아

 


현장에서 잔뼈 굵은 굴삭기 사내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세상의 집들과 모든 여자들
모두 제 손바닥에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자신을 위로하는 과대망상,
또 나온다 작업하다 말고
내 몸 파고들며 예리하게 훑는다
새 애인 만들고 싶은 속내 언제 읽었는지
슬쩍 작업 걸어 온다
때마침 갈 데까지 간 애인은 연락두절이다
이미 유통기간 지난 사랑이
입맛 더 돌게 하던 참이었다
별난 식성이야 내 잘못이 아니다 사내는
내 알칼리성 체질을 산성으로 교체해야 한다며
무례한 의지를 보인다


정비소에서 직업 훈련을 마친 사내
굴삭기 무겁게 끌고 와 나를 다듬는다
봄날, 나를 재건축한다
세상 함부로 넘보는 내 마이너스 안구 갈아 끼우고
보톡스보다 성능 좋은 암*으로 주름살 편다
감쪽같이 도색했던 욕망이 드러나고
달팽이관 덜어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내 소원을 탐독하는 사내
새 애인이 되겠다고 매달리며 내게 불법 체류하는 사내
그러나 나를 함부로 탐독하지 마라

 

* 암(arm) : 굴착기 구조의 하나로 붐과 버킷을 연결하는 것으로 굽히기 펴기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당선소감]

 

 

 비록 시가 나를 배반할지라도


  매순간 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시인세계》와 부끄러운 내 시를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시를 붙들고 있었지만 시는 좀체 나와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나 보란 듯, 피보다 먼저 내 몸을 한 바퀴 돌고는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욱 희미해지는 시력, 두려웠습니다.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젖은 발을 모으고, 오도카니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구절 때문에 자주 덜커덕거려야 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와 이미 죽은 시의 경계에서 그저 방황하기만 했을 뿐, 내 아픈 시늉은 아무것도 돌려놓지 못했습니다.
  시는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였고, 그 불편함은 내 시 속 삐딱하게 들어앉아 걸핏하면 새벽잠을 불러들이곤 하였지요. 나와 놀아 주는 그 불편함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살맛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소리는 없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사람들이 놓쳐 버린 것을 곁눈으로 줍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나도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시를 써야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이런 불편함을 잘 숙성시켜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일, 그 속으로 세상이 버린 은유들을 불러들여 못살게 구는 일. 비록 시가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그 일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겠습니다.


  끝으로 내 몸과 생각에 함부로 힘이 들어갈 때, 힘을 빼라고 타일러 주신 이성복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굳세게 시 우물을 파고 있는 계명대 문창과 식구들과 내 가족들, 이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여성시의 또 다른 시각 - 김종해

 

  유례없이 많은 211명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14명의 작품이 최종심에 남았다. 마지막까지 5명의 예비시인이 경합했는데 임현의 「판도라의 상자」(외 9편), 한요의 「달려라 덩굴」(외 10편), 박혜정의 「여섯 개의 시선」(외 9편),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외 9편),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외 9편)이 그들이다.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다섯 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규정 때문에 한두 작품의 역량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임현, 박혜정, 한요 세 사람이 먼저 탈락하였다. 하얀의 작품과 임창아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했는데,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은 시로서의 자유분방한 개성과 상상력은 살 만했지만 시의 유기적인 연결이 거칠었다.
  당선작으로 뽑힌 임창아의 시 「살아 있는 공」을 비롯한 4편의 작품은 화자話者가 체득한 독특한 자기경험이 시편마다 이야기의 궤軌를 달리하며 시화되어 있다. 이 시인이 진술하는 자기경험의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삶의 문리와 지혜가 터득되어 있고, 시로서의 공감대를 획득한다. 성性을 금기시하지 않고 자기고백을 통해 시원스럽게 드러내 보여주는 시 「어떤 일의 순서」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공」에서는 셔틀콕을 헛손질하는 화자가 “허공은 얼마나 아팠겠으며/바닥 치는 공은 얼마나 민망했겠는가”라는, 누구도 전혀 생각해 봄직하지 않은 엉뚱한 진술을 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미소가 떠오르게 만든다.
  더구나 시 「어떤 일의 순서」에서는 여성성의 시각에서 본 수소와 암컷의 교미를 동물적 성애로서보다 ‘수컷의 신사적 마무리’와 ‘순서’를 생각하며 “저 말없음의 예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격조를 높인 여성성의 자기주장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날카로운 직관이 찾아내는 여성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한다.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 - 정호승

 

  당선작 :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외 9편)에 대한 소견
  시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물과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시적 세계를 예리하게 칼로 도려낸 듯하다. 「살아 있는 공」의 경우, 공과 선과 바닥의 관계를 통해 너와 나와 우리라는 인간관계의 비밀을 성찰하게 만든다. 특히 수소를 교미시킨 대가로 받는 돈과 시적 화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어떤 일의 순서」는 전체적으로 지극히 산문적으로 형성돼 있으나 ‘일의 순서’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은유의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근원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인은 신인 아닌 신인이다.
  최종심에 오른 타작품에 대한 소견
  한요의 「달려라 덩굴」(외 10편)은 행과 행 사이가 느슨해 전체적으로 긴장이 떨어진다. 특히 「망치질하는 사람」의 경우, 상식적이고 상투적이다.
  임현의 「판도라의 상자」(외 9편)에서 「비누적 사유」 「옷의 뼈」 등에 나타난 시적 상상력은 감동적이다.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외 9편)은 산문시에 의존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게 문제점. 산문시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이 결핍된 상태에서 오늘날 한국시단에 횡행하고 있는 산문시의 유행을 따라가고 있다는 의심이 간다.


 

보기 드문 ‘걸출한 신인’ - 정끝별

 
  임현의 「판도라의 상자」 외 9편,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 외 9편,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 외 9편이 최종까지 논의의 대상이었다. 「비누적 사유」나 「옷의 뼈」에서 보여주는 임현의 시적 사유의 새로움과 진폭, 「도시이력기초문법」이나 「구름은 이상도 하지」에서 보여주는 하얀의 분방한 상상력과 세련된 언어운용은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시적 성취에 있어서 다른 작품과의 편차가 크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멀지 않은 날에 ‘동업자’로 만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 외 9편을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의견이 일치했다. 능청과 정곡, 치밀과 분방, 집중과 방출, 통찰과 유머가 버무려진 맛깔스런 시편들은 신인답지 않을 정도로(!) 녹록치 않은 시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셔틀콕의 움직임을 좇는 집요한 관찰력과 거기서 삶의 비의를 묘파해내는 「살아 있는 공」의 시적 통찰은 날렵하고, 돈과 성性과 삶을 굴비처럼 줄줄이 한 쾌로 엮어내는 「어떤 일의 순서」의 천연덕스러운 시적 절제는 깔끔하다. 시쓰기의 자기반영성을 보여주는 「선택된 시」의 언어적 자의식은 유연하고, 서사적 욕망에 기대 풀어내는 「주름잡던 시절」의 시적 방출은 활달하다. 보기 드문 ‘걸출한 신인’임에 틀림없다. 막힘없는, 시인의 새날을 기대하며……


 

[예심평] - 박후기


  《시인세계》 홈페이지의 온라인 신인작품공모를 통해 투고된 응모자가 54명, 비공개 이메일로 투고된 응모자가 122명, 우편으로 투고된 응모자는 35명. 응모자를 합하면 모두 211명, 2500편이 넘는 작품이 투고되었다. 작품을 들여다보며 문학의 위기, 시의 위기라는 말은 앓는 소리라는 생각을 했다. 좀더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위기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슬며시 들기 시작한다. 결국, ‘시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이 작품을 선하는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너무 ‘시다운’ 작품은 제외하자는 생각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틀에 박히지 않되 절제와 거침없는 사유를 함께 지닌 ‘가능성’을 발견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졌기 때문일까? 적지 않은 작품들이 실업 등 고단한 생활에서 비롯된 불안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여과 없는 감정의 남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험은 시의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경험 그 자체가 시는 아니다. 아울러 상상력 그 자체가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쯤에 시의 자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길지 않은 역사에 비해 걸출한 신인들을 다수 배출한 《시인세계》의 명성에 걸맞게 전반적인 작품의 수준도 생각 외로 높았다. 시에 대한 열정, 그것은 유일하게 기성시인보다 신인들이 더 많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자질이다.
  열네 분의 작품을 추려 본심에 넘긴다. 모두 당선자가 되어도 좋겠다는 게 선자의 생각이지만, 당선의 기쁨은 한 분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시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제의인 것을.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결심에 오른 나머지 분들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분발하면 멀지 않아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제14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투고자 중 예심을 거쳐 온라인, 오프라인 본심에 오른 14명의 명단과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광섭 「리ː플러」 외 9편
박천순 「가방과 악어」 외 11편
박혜정 「여섯 개의 시선」 외 9편
유성애 「아이비팰리스」 외 11편
이 빈 「관문성에 들다」 외 9편
이은영 「발바닥」 외 9편
이현옥 「비쿠냐의 꿈」 외 10편
임창아 「살아 있는 공」 외 9편
임 현 「판도라의 상자」 외 9편
조영민 「수상한 달」 외 9편
하 얀 「도시이력기초문법」 외 9편
한 요 「달려라 덩굴」 외 10편
허 민 「강아지풀」 외 9편
황송희 「평범한 생각」 외 9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