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의 <시론>
잉어를 놓아주자!
詩라는 선물
내 고향마을인 서산의 B지구 간척지 수로에서 낚시로 50cm크기의 커다란 잉어를 잡은 적이 있다. 그 기쁨에 너무 흥분이 되어 나는 어망에 잉어를 담아 들고 집으로 오면서 혹시나 죽지 않을까 염려되어 논물에 여러 번을 담갔다가 달리고, 다시 논물에 어망을 담갔다가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라, 내가 이렇게 큰 잉어를 잡았다!”
하지만 식구들은 내 생각과 달리 그냥 시큰둥했다. 별개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식구들이 민물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나는 그것을 아랫집 아저씨에게 줘버려야 했다. 텅 빈 어망을 들고 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잉어를 낚을 때의 그 푸른 물빛, 서산 B지구 간척지 하늘 위로 날아가던 해오라기, 바람의 냄새, 찌의 움직임, 그 잉어가 낚싯바늘을 물었을 때 손끝으로 당겨지던 그 저릿함, 물속으로 내 몸을 무한정 끌어당기며 휘어지던 카본 낚싯대, 그리고 한참동안 풀었다 당겼다하며 겨루던 그 잉어와의 싸움, 뛰어오던 그 좁은 논둑길. 그거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갖게 될 진짜 잉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그 잉어를 놓아주었어야 했다. 왜냐면 그 힘세고 수염 난 잉어가 나에게 줄 수 있었던 모든 선물을 나는 그 순간 모두 받았기 때문이었다.
목수
두 번째 시집을 출판사로부터 받고 나서 나는 어떤 감격보다는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시들이 이미 나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이젠 분명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첫 번째 시집에서도 나는 그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그 때문이지 당시 나는 책을 받아놓고도 정나미가 떨어져 한 달이 넘어서야 그 책을 들어 읽어볼 수 있었다. 내가 언제 이런 시를 썼던가 하는 낯설음까지 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한때 전국 팔도를 돌며 큰 집을 짓던 대목이었는데, 아버지 왈, “목수란 집을 짓는 사람이지 그 집에 들어가 주인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들 자기 손으로 번듯하게 큰 집을 짓고 나면 나도 한번쯤 그 집의 주인노릇도 하고 싶고, 그 집 아랫목에 누워 다리도 뻗고 싶고, 따듯하게 등도 굽고 싶고, 대청마루에 앉아 땀도 식히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겠느냐? 하지만 목수란 그게 아니다. 얼른 연장을 챙기고 툭툭, 톱밥을 털며 떠나는 사람이다.”
비로소 나는 두 채의 집을 지었다. 첫 번째 집은 나름 유쾌한 집이었고, 두 번째 집은 조금 슬픈 집일 것이다. 이 집에 들어와 사는 또 슬픈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슬픔이 그 주인의 구들이 되고, 서까래가 되고 대청마루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슬픈 사람들을 위해 들보(梁)의 역할을 잘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나는 낡은 톱을 챙기고, 날이 무뎌진 대패를 챙기고, 닳고 닳은 먹필과 먹줄을 챙기고, 나무의 향을 챙기고, 목수로서 가졌던 아버지의 거칠고 겸손한 손과 장인(匠人)의 마음가짐을 봇짐에 단단히 챙겨야 할 것이다.
나의 종교
페루 인디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전 낚싯대와 대화를 한다. 너는 바다에 나가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될 거야. 이 말을 통해 그 낚싯대는 고기를 잘 잡는 낚싯대가 된다. 남태평양 어느 섬의 원주민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날이 선 톱이 아니라 아우성이다. 모든 주민들이 쓰러뜨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3일 밤낮 나무를 향해 고함을 쳐댄다. 그러면 나무속에 깃들어 있던 혼이 빠져나가면서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진다. 나의 시 쓰기도 이런 행위와 다름없다.
詩, 그 크고 자랑스러운 자지
몇 해 전 추석에 62세를 먹은 큰 형님이 84세인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바바리맨 인형이었다. 30Cm키의 바바리맨은 약간 뚱뚱한 몸집에 안경을 끼고, 대머리에 콧망울이 크고, 검은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 문제의 인형이 추석 전날, 아들, 손자, 며느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가운데에 꺼내졌다. 바바리맨은 잔뜩 바바리코트 자락을 여미고 있었다.
순간, 큰 형님이 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쥐고 있던 그 바바리맨이 바바리자락을 확, 열어 제치며, "으하하하,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소리"를 지껄이더니, 맨 몸에 커다란 심벌을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심벌은 아주 거대하고 사실적이었다. 며느리들은 고개를 돌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40년 살아오면서 들었던 웃음 중 가장 기분 좋은 웃음으로 눈물까지 짜내면서 웃어 제꼈다.
바바리맨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바리코트 자락을 여미며, 처음 그 자세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더 재미난 광경이 이어졌다. 이 바바리맨 인형은 소리를 치면 반응을 하였는데, 어머니께서 그 인형을 향해 한명씩 아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영민아" 하고 소리를 치자 그 바바리맨 인형이 "으하하하~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소리"를 지껄이더니 커다란 심벌을 어머니 앞에 흔들기 시작했다.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 형님, 형수님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면서 다들 뒤로 넘어갔다.
그 다음, 또 다른 아들 이름이 불러지고 한명씩 차례대로 어머니 앞에서 커다란 심벌을 흔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어머니는 과수원을 하다가 사고로 죽은 넷째 형님의 이름도 빠뜨리지 않았고 똑같이 뒤로 넘어갈 듯 웃어 제꼈다. 정말 죽은 자식이 어머니 앞에 서서 커다란 심벌을 흔들어 보이기라도 하는 듯 하였고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바바리맨 인형은 지금 시골집 안방 텔레비젼 위에 바바리 깃을 여민 채 서 있다. 어머니는 가끔씩 아들 녀석들이 생각나면, 그 바바리맨을 향해 아들 이름을 소리쳐 부를 것이며, 그때마다 아들은 어머니 앞에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은 맨 몸으로 가장 크고 자랑스러운 자지를 흔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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