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 안도현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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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弔文) /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주던
이 동네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 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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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어회와 깻잎 / 안도현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 창비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 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리운 여우>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등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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