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외 5편 / 권혁웅

시인 최주식 2010. 1. 31. 20:28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외 5편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애마부인 약사(略史) / 권혁웅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略傳) /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 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0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畵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 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서 내가 건넨 꽃은 조화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밀실의 역사 / 권혁웅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로구나. (이곡 「소포기」)

 

  1. 사막

 

  방에 위도와 경도를 매겨, 지상과 일대일 축척을 실현한 이모에 관해선 방금 말했다 외할머니가 부를 때마다,
이모는  고비 사막을 넘어  달아났다  대상도 낙타도 없이……그곳을 건너가는 데 한 뼘이 걸렸다

 

  2. 벼랑       
       
  형은 여름 한낮이면  다락에 올라가 오수를 즐겼다  가끔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디딤판 위에서
코피를 흘리며 코를 고는 형이 있었다  거기가 낙화암도 아닌데, 형은 삼천 번 정도는 몸을 날렸을 것이다

 

  3. 전장

 

  주인집 작은형은 평생을 그늘에서만 산 군주였다 형의 유일한 적수는 나였다  형은 기병과 포병과 보병과 전차
와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내게 쳐들어왔다 나는 자주 말발굽에 밟히거나 코끼리와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했다

 

  4. 탑

 

  우리는 주인집 막내를 동장군(冬將軍)이라 불렀다 한밤에 변소에 갔다가  구멍에 빠졌던 애다  한겨울이어서 그
애는 똥탑을 기어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애를 피해다녔다  추위와 똥독을 이겨낸  불굴의 장수
였으므로

 

  5. 식당

 

  주인집 작은누나는 가출한 후에  도루코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청춘을 보냈다 한번은 면도칼을 씹다가 주먹에
맞아  입안이 통째로 날아갔다 한다  그래서 삼양라면을 한 올씩 삼키며 두 달을 살았다 입이 좁은 문이었던 거다


 

 

돌아온 외팔이 / 권혁웅 

 

  그가 돌아왔다 시장 입구에서 만난 그는 역시 고수였다 오른손만으로 빠르게 붕어를 잡아서 굽고 뒤집고 석쇠 위에 올렸다 봉투에 담아가는 일은 쎌프 써비스였지만, 그가 손을 쓰면 죽은 붕어와 흘린 단팥이 시산혈해를 이루곤 했다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까 두려웠다 소매 끝에 수은 갈고리가 차가운 빛을 뿜곤 했다 그가 두고 온 왼손이 지금도 주인을 찾아 월남의 밀림을 헤매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다 시장을 지나갈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검은 두건을 쓴 단속반은 떼로 몰려다니며 상대방을 급습하곤 했다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있다 터진 밀가루 부대에서 가루가 날리듯 그는 흩어졌다 이런 비겁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시집 <마징가 계보학>2005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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