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작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 김왕노
황진이 네 생각이 죽은 줄 알았다. 아파트 납골당을 지날 때, 묘비가 된 빌딩을 지날 때, 황진이 생각이 새까맣게 죽어 간줄 알았다. 어디서 육탈되어 뼈만 남아있는 줄 알았다. 난 애도나 명복 한 번 빌 줄도 몰랐고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 죽은 줄만 알았던, 황진이 생각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을 초월해 황진이 생각이, 긴 치맛자락 나부끼며, 자유롭게, 모든 저지선을 뚫고 오는, 황진이 생각, 붉은 입술의 황진이 생각
이제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를 찾아 이 시대에는 없다지만 그럴수록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같이 붉은 칸나 키우며 황진이를 찾아, 내 영혼의 뿌리를 담글 속 깊은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나의 계집 황진이를 찾아, 남 몰래 살 섞을 황진이, 우리의 황진이가 아니라 나의 황진이를 찾아, 방도 붙이고, 실종 신고도 내고,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황진이, 붉은 옷자락의 황진이를 찾아, 하얀 이마를 찾아, 조개 보다 더 꽉 다문 황진이의 정조를 찾아, 죽창보다 더 꼿꼿한 황진이의 지조를 찾아
직장에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강남에서, 광화문에서, 황진이 내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가냘프나 올 곧은 정신의 황진이, 나를 불태울 황진이, 나를 재로 남길 황진이, 쭉쭉 빵빵 사이로 거침없이 오는 황진이, 사이트로, 극장가로, 로데오 거리로, 현상금도 내걸고, 전단지도 뿌리며, 기어코 찾아야할 내 황진이, 내 몸의 황진이, 내 넋의 황진이
황진이 네게 사무치는 말들이 저렇게 푸른 하늘을 밀어오는데, 수수밭 사이로 초가을 호박꽃 피우며, 벌써 차가워진 개울물 건너오는데, 황진이 말 타고 네 치마폭에 파묻히려 청동방울 딸랑거리며, 개암나무 뚝뚝 떨어지는 전설 속을 지나, 산발한 채로도 가고 싶구나. 황진이 네 은장도 빛나는 밤, 올올이 엉키던 넝쿨이 틈을 보이는 계절, 네 머무는 마을에 꿈이 깊고, 우물물 깊어져 마을을 파수하는 개 울음 높아가는 밤, 네 있는 마을은 이조의 어느 모퉁이인가. 기우는 사직의 어느 뒤란쯤인가.
쭉쭉 뻥뻥하게 다가오는 세월 사이, 저 비대한 몸짓 사이 너는 오늘도 보이지 않고, 난 새털구름 따라 흐르는 갓 태어난 철새 같이, 끝없이 사방으로 풀려가는 쪽물 같이, 네게 끌려 흐르고 싶은, 황진이 네 웃음소리 청아한 마을, 처연한 내 그리움 앞세우고 찾아 가는 황진이, 황진이 네 붉은 마음을 찾아, 구비 구비 너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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