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다이어트 / 박남희
그림자가 나를 뜯어먹고 있다 나는 그림자 곁에서 야윈다 나인 듯 하면서도 내가 아닌 그림자가 나는 무섭다 나를 감시하는 걸까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나를 졸졸 따라 다니다가도 돌연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림자,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 키를 늘여 눕혀놓기도 하고 내 형상을 온통 흑백의 자화상인 듯 세상에 불쑥 내미는 그림자,
그런데 그림자를 자세히 보니 어딘가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림자의 저 놀라운 집착력에 나는 잠시 아찔해진다 내 몸과 바닥에 몸을 걸치고 떨어질 줄 모르는 저 양다리 생존법이 나는 겁난다 그러고 보면 내 몸이 야위는 것은 그림자의 양다리 생존법 때문이다 내 몸의 양분을 나 몰래 바닥에게 전해주는 저 음흉한 자태를 보라,
나는 그림자가 무섭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자가 고맙다 세상의 온갖 색깔에 물들어가면서 점점 비대해지는 내 몸을 한 순간 얇은 흑백의 과거로 되돌려주는 저 놀라운 흑백 다이어트, 고맙고도 놀라운 그림자에게 오늘도 나는 감사히 내 몸을 맡긴다
내 몸은 이미 전 생애를 저 하늘의 빛에게 투시당했다 빛은 엑스레이를 찍듯 내 몸을 찍어 하루 분량의 동영상 필름 한 통을 또 남길 것이다 저 필름 속에 내 병명이 들어있다 야위어가는 내 몸의 비밀을 그림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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