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검은 불가사리 / 지하
▶ 그림=강경구 |
……여기 앉으면 되나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이 어떠냐고요? 네,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났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시라고요.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들은 제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지만요. 제가 미쳤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어제는 제 앞에서 그러더군요. 만약 정신이상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형, 하늘이 도우셔서 운이 엄청나게 좋아도 최소한 종신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 저를 미쳤다고 판정해 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인가 봐요. 참, 우습죠. 그러지 못하면 저는 죽을 수도 있다니. 미친 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알아요. 지금 노트에 '다어증'이라고 쓰고 계시죠? 말이 정상보다 훨씬 많아지는 증상 말이에요. 대학교 때 심리학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 대충 알거든요. 사실 제가 생각해도 지금 전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상태예요. 보통 이런 상황에선 미친 사람들은 의사가 무슨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하지 않죠? 눈을 맞추지도 않고, 자기 얘기를 하지도 않죠? 아뇨, 이건 영화에서 본 거예요. 하하. 그러면 의사가 말하잖아요. 이거 보세요 누구 씨,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야 해요.
하지만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저는 누구보다 할 얘기가 많아요. 미친 사람의 불안 때문에 나타나는 다어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저는 미치지 않았고, 미치지 않은 상태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제 얘기를 선생님이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마지막 희망이시잖아요.
잠깐만요.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부탁이에요. 선생님, 잠깐만 제 눈을 똑바로 봐 주시겠어요? 그렇게 피하지 마시고요. 조금만 더요.
네, 됐어요. 지금 본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사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하지만 지금 대답을 듣고 싶진 않아요. 제 얘기가 끝나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말하는데 부탁드려요. 잊지 말아 주세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네, 그 일이오. 그 일이 일어난 건 1월 초의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어요. 춥고 건조한 날이었죠. 십 년 만에 찾아온 따뜻한 겨울이라고 언론에서 연신 보도를 해댄 지 한 달이나 됐지만 추웠어요. 날씨가 발악을 하고 있었죠. 마치 헤어진 연인에게 자신이 잊혀졌다는 걸 인정 못 하는 젊은 여자처럼요.
춥고 건조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눈이 아파 왔을 때 콘택트렌즈 부작용이 또 도졌구나 하고 생각했죠. 오른쪽 눈에 빡빡한 이물감이 처음으로 느껴졌을 때 말이에요. 잊을 만하면 일 년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일시적인 고질병이었거든요. 남자친구와 영화관에 들어가 아홉시 반 영화표를 예매했는데 눈이 시큰시큰 아려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를 빼냈죠. 대신 안경을 꺼내 쓴 후, 거울 속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천천히 점검했어요. 만일에 대비해 안구 충혈을 막아 주는 안약을 충분히 집어넣기도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오른쪽 눈동자에는 약간의 붉은 기운이 감돌았을 뿐 특별한 전조는 없었거든요.
남자친구는 어, 안경이야?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어요. 제 남자친구요? 이제 사귄 지 이 년이 좀 지났어요. ……살아 있다면 이 년 육 개월쯤 되었겠네요. 요즘 같아서는 오래된 커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네, 조금은 권태로워질 법도 할 만한 시기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어요. 그는 더 이상 저와의 첫 키스나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더 이상 그에게 눈물을 머금어 가며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를 건네지 않았어요. 제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나 부스스한 옷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도 않았죠. 물론 처음엔 안 그랬지만요. 그렇다고 우울하다거나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으니까. 그 사람, 저를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한때는 사춘기 소녀처럼 그런 일에 체념하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달라지더군요. 우린 더 이상 서로에게 매 순간이 찬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실이 딱히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죠. 익숙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시기였다고 할까요.
그 사람 팔을 붙잡고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어요. 영화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잊혀진 슈퍼히어로 가족이 부활하는 얘기였어요. 신나고 통쾌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이었죠. 아, 보셨다고요?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그 장면이 제일 좋았는데. 왜, 주인공이 사실은 슈퍼맨 뺨치는 초능력 영웅인데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더미에 묻혀 있는 장면 있잖아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의 커다란 엉덩이에 비해 앉아 있는 의자가 너무 작아서 참 많이 웃었던 게 기억나요. 정말이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웃었어요. 몸 구석구석의 아드레날린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 터뜨려 주는 것 같았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정말로 눈이 튀어나와 버리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안경알을 덮어 다 흐려지게 만들고도 남아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바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남자친구는 많이 당황했어요. 처음엔 제가 무언가에 감동해서 우는 줄 알았나 봐요. 재미있는 영화 보고 왜 울어?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미 제 눈은 불타는 것처럼 아픈 상태였어요. 마치 모세혈관들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 같았죠. 아마 눈동자 전체가 새빨갰을 거예요. 정상적인 눈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으니까. 그 사람 부축을 받아 집까지 겨우 돌아왔어요. 그리고 안약을 조금 더 넣고 잠이 들었죠. 웃으라고 만든 영화 보고 눈물이 쏟아지다니 참 웃기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영화,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세상에서 슈퍼히어로는 좋은 직업이 아니잖아요.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지나치게 위험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안과에 들렀어요. 의사 선생님은 예상대로 콘택트렌즈 부작용이라는 처방을 내리더군요. 그리고 일 년에 몇 번씩 들를 때마다 늘어놓던 설교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했어요. 양초 비슷하게 생긴 고체 안약을 눈에 넣고 열치료를 잠깐 받은 뒤에, 거즈를 대고 안대를 단단하게 고정시켰어요. 일 주일간 절대로 떼지 말라고 하더군요. 눈을 쉬게 해야 한다면서,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하지 말라고요. 제 눈이 특히 민감한 편인데, 너무 많은 걸 보려고 시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던가요.
선생님은 아마 지금쯤 되는 타이밍에 한 번 묻고 싶으시겠죠? 공상과학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요. 아뇨, 전 그다지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한 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중독돼 버릴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그런 영화들은 피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종류의 책들도 읽은 적 없어요. 아마 읽었더라면 이제부터 들려드릴 얘기를 좀더 그럴 듯하게 꾸며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제가 좀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렇게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 일은 실제로 제게 일어났던 일이라고요.
그날 아침 초인종이 울렸을 때, 저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두 번인가 초인종이 울렸죠. 겨우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여섯시 반이었어요. 누군가가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죠.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을 때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더군요.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면서 현관으로 다가갔죠.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현관문에 난 구멍으로 밖을 봐도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 뭔가 놓여 있었어요. 소포처럼 보이는 상자였죠. 누런 소포지로 포장돼 있었고 가로세로 삼십 센티미터, 높이 이십 센티미터 정도? 수신인 부분에 제 이름과 주소가 깨끗한 흰색 종이에 프린트되어 오려붙어져 있었어요. 발신인 자리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고요.
이상했어요. 소포를 보낼 사람 따위는 없었거든요. 친구? 전 직장 동료? 그것도 아니면 언젠지도 모르게 응모했던 온라인 이벤트 당첨 상품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발신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 아무 생각 없이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소포지를 북 찢어냈죠.
흰종이 상자 하나가 나왔어요. 시험 삼아 흔들어 보니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쌀알이나 모래알 같은 작은 알갱이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죠.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다시 매끌매끌하고 두툼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어요.
스니커즈 초코바, 처음엔 뭐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딱 그 크기였죠. 스니커즈 덕용포장 정도 되는 크기의, 불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무언가였어요. 정말이지 처음엔 누군가가 초콜릿을 선물로 보낸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안에는 무언가 작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고 겉에는 딱 한 문장밖에 씌어 있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영문으로 그렇게 인쇄가 되어 있었어요.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혹시 아세요? 그거, 노래 제목이기도 해요, 플레시보라는 그룹의. 참 이상했죠. 그 곡,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쩐지 이런 게 연상되잖아요. 신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혹시 성서에 나오는 말이던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요. 참, 전 신을 믿지는 않아요. 교회에 몇 번 나가 보긴 했지만.
어쨌든 그 소포는 이상했어요.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제목이 적힌,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면서 흔들어 보면 사락사락 소리가 나는 비닐 주머니라니. 꼭 저를 잘 아는 누군가가 보낸 짓궂은 깜짝 선물 같았죠. 요즘엔 그런 이벤트 선물 같은 거, 제작도 해주잖아요. 하지만 문제는 제게 그런 선물을 보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 일단 보낸 사람이 밝혀질 때까지 그걸 뜯어보지 않기로 했죠. 한편으론 더럭 겁이 나기도 했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좋지 않은 게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그걸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 두었어요. 그러고는 곧 잊어버렸죠. 그게 눈의 통증이 시작되기 약 한 달쯤 전의 일이었어요
……잠깐 물 한 잔만 마시고 계속해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목이 말랐거든요. 선생님은 참 친절하시네요. 하긴 그러니까 이 일을 하시겠지만요. 지금까지 이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누구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어요. 하긴 미친 사람 얘기로 들리겠죠. 제가 생각해도 조금은 미친 소리 같다는 거 잘 알아요. 선생님, 그런데요, 제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이세요? 제가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같이 보이나요? 아뇨,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제 말은, 제 얼굴에 그런 무언가가 드러나는지 궁금해서요. 거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됐거든요. 이곳에는 거울이 없으니까, 제가 어떤 얼굴인지 확인한 지도 꽤 오래됐네요. 어쩌면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안대요. 일주일이 지나서 안대를 풀었어요. 통증은 처음보다 훨씬 덜해졌지만 그때까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죠.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안대를 감싸고 있던 반창고를 쥐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떼어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오랫동안 빛이 차단되어 있었으니까. 방 안의 밝은 조명을 대하자 아주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 거울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어요.
선생님, 선생님도 지금 보고 계시죠, 제 눈을요. 지금은 양쪽 눈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오른쪽에서 시작된 거예요. 네, 검은 별이 눈에 박혀 있었어요. 검은 별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동공이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별 모양으로 변해 있었죠. 그때부터 이런 모양이 된 거예요. 이런 거 보신 적 없을 거예요. 그렇죠? 별 모양이라지만 사실 좀 웃겨요. 너무 전형적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지루할 때 연습장 한 귀퉁이에 볼펜으로 쓱쓱 그려 넣곤 하는, 정말이지 너무 별처럼 생긴 별 모양이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거울을 보고 처음엔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엔 막 웃었겠어요. 이건 뭘까, 농담의 한 종류인가?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실명도 아니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동자가 별로 변하다니요. 사랑에 빠진 순정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말이에요. 믿을 수 없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서 찬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한 뒤에도 눈에 박힌 별은 그대로였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든 과정은 이미 끝난 상태였어요. 결과만이 남아 있었죠.
다행이었던 건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더 이상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앞을 보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죠. 그냥 어느 날 한쪽 눈동자가 별로 변해 버린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 이상, 두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제 전화를 받은 그는 무슨 소리냐면서 당장 저희 집으로 달려왔죠. 그런데 현관문을 열어 주자 들어온 그가 저를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게 느껴졌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그의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그는 제 눈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내일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아. 수술하라고 하면 받아.' 그는 수술비가 모자라면 빌려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여전히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전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그는 평소와 같이 저와 시간을 보냈죠. 섹스를 하고, TV를 보고,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그러고는 돌아갔죠. 이상하게 들리세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랍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냥 제 한쪽 눈이 별로 변해 버린 것밖에는. 이렇게 말하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쩐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울거나 소리지르면서 '내 눈이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넌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거야?'라고 말해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있었어요. 마치 나쁜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말을 해야겠는데 무언가가 성대를 붙잡고 그 단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죠. 정말이지 이상했어요. 이상했지만 저는 웃었어요. 그리고 섹스를 하면서는 기뻐서 신음을 했고, 밥을 먹으면서는 맛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태를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그럴 때도 있지 않나요? 선생님은 그럴 때가 없으세요? 상황이 악화하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의 끔찍함을 눌러 버릴 때가요. 사람들의 눈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정하려는 자기 마음이 무서워질 때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에요.
돌아갈 때 보니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더군요. 어쨌거나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어요. 그날 밤, 저는 땀을 많이 흘리며 잠을 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더군요. 어차피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기에 저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일주일 전에 갔던 안과에 다시 찾아갔지요.
나이 많은 의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몇 분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눈을 바라보았어요.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저는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홀쭉하게 말라서 군살이 없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노끈으로 제 눈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죠. 그리고 눈을 돌렸을 때, 그는 다시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죠. '보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어요. '여기서는 고칠 수가 없어요. 큰 병원에서는, 거기서는 또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 결과는 같을 겁니다.' 저는 불끈 화가 치솟았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꼴을 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아직 젊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언가가 제 입술을 붙들었어요. 분명히 해결책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수술 가능성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더군요. 일 년에 몇 번 들르지 않는 병원이었지만 저는 그 나이 든 의사에게 일종의 신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거짓으로 환자를 위로하거나 반대로 두려움을 품게 만들어 치료비를 우려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제 눈에 들어 있는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그를 그렇게 어렵고 두렵게 만든다면, 아마도 없애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제가 가난하냐고요? 글쎄요. 오래 전에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렇지 않게 됐어요. 대학을 마치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고, 꼬박꼬박 적금을 붓고, 독립한 뒤 집을 조금씩 넓혀 갔고 부모님에게도 매달 많은 돈을 보내드리고 있으니까요. 직장 생활도 아주 좋았어요. 모두 제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했죠. 무슨 일을 했냐고요? 사람들의 자서전을 썼어요. 대기업 사장들이 가장 많고, 젊은 나이에 무너지기 직전의 사업을 물려받아 크게 키워 성공한,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이렇게 말하면 좀 쑥스럽지만, 전 그들의 인생을 멋진 문장으로 포장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실제로 그들은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역할은 그것을 약간 더 멋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제 인생은, 아무리 멋진 문장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어떤 한계 이상으로 빛이 날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아니, 선생님은 좀 다르시려나?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아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어요. 마치 손가락 튕기듯 말이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 일은 보수도 높았죠.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가 그 직업을 택한 것을 좋아했어요. 물론 저도 좋아했죠.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잠깐만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그런 걸 쓴 적이 있었나요? ……아, 그거요. 대학 시절 신문에 재미 삼아 썼던 거예요. 용케 가지고 계시네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자료로 보관하고 계시군요.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 시절에는 시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지 않나요?
……그 시 제목이 '불가사리'였어요? 저는 잊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아니, 읽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알아요. 저 사람들이 따라올 테니 어차피 5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잠깐 이것들이 움직였을 뿐이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까부터 계속 제 얼굴을 보지 않고 계시니까 설명해 드릴게요. 이것들은 이따금씩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해요. 다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거죠. 지금은 15도 정도 돌아가 있을 거예요. 아뇨,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처음엔 마취 없이 눈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죠. 잠들어 있다가도 종종 깨어나곤 했어요. 눈물은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눈의 흰자위 전체가 붉게 변해서 사람들은 제가 울었다고 생각하곤 하죠. 물론 저를 본 사람들은 다시는 제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되지만요.
네, 그들은 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아요. 문자 그대로 제 눈을 한번 들여다본 사람은, 다시는 저와 눈을 맞추지 못해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그것이 제가 감당해야 할 한 가지 나쁜 일이었어요. 이상했죠. 이상하고 슬펐어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거든요.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죠. 모두들 조금씩 두려워하는 것 같긴 했어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새롭게 제 영혼을 들여다보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죠. 하지만 따져 보니 전에도 제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큰 병원에는 가지 않기로 했어요. 그대로도 괜찮을 것 같았거든요. 게다가 시력은 오히려 더 좋아졌지 뭐예요.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으로만 세상을 보니 안경도 콘택트렌즈도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부모님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가 차례로 제 눈을 들여다보았어요. 공통된 게 있다면 그들이 그 즉시 그 화제를 피했고,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잘 지냈답니다. 직장에도 계속 나갔고 통증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비닐 주머니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던 도중에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문득 집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그 비닐 주머니의 파란 색 포장이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오면서, 회의 문서의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려지기 시작했죠. 저는 그 소포를 받고 석 달 동안이나 그것을 잊은 채 내버려 두었던 거예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책상 서랍을 열고 그것을 끄집어냈어요. 그건 제가 넣어둔 대로 그 자리에 있었죠. 그런데 그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처음 받았을 때처럼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면서, 무언가가 그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죠.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게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잘 알아요. 이제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거짓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다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무언가 벌레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감촉이었고, 꼭 그런 움직임이었어요. 저는 순간적으로 그 비닐 주머니를 방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러자 그것들이 스스로 비닐을 찢고 나오더군요.
네, 그것들이었어요. 저는 똑똑히 봤어요. 그것은 작은 사람들이었어요. 밀랍으로 만들어진 작은 병사들이었죠. 저마다 등에는 소총 같은 것을 둘러메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 동네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G.I. 유격대' 그 비슷한 이름의 미니어처 세트에 들어 있는 작고 단단한 병사들과 똑같이 생긴 군인들이었어요. 수없이 많았죠. 수백 명쯤 되었을 거예요. 그것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듯하다가 곧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방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침대 밑으로, 책상 밑으로, 싱크대 밑 어두운 구석으로.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이상한가요? 하지만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스르륵 하고 저마다 위치로 달려들어갔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죠. 네, 그것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청동을 녹인 액체가 스며들듯이, 불을 켠 방안에서 흠칫 놀란 바퀴벌레 떼가 어둠을 찾아 달려들어가듯이, 그것들은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제 방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어요.
꿈을 꾼 게 아니냐고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차라리 꿈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어요. 소리도 지를 수 없었죠. 저는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할 수 없었어요. 사실 오른쪽 눈이 이렇게 변해 버린 뒤로 저는 제 주위의 사람들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자칫하면 그들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들은 제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제 곁에 있었고 저는 그게 고마웠습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제 선에서 해결하고 조용히 지내는 게 좋겠다고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저는 제가 피로하고 약해져서 눈을 뜬 채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비닐 주머니를 복도 끝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다시 단단한 현실이 저를 지탱해 줄 테니까요.
하지만 꿈은 그날 밤에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도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고 지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이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가 꿈 얘기를 하며 정말 현실 같아서 가슴이 설레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고 말하면, 그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자각만 밀려왔지요.
하지만 그날 밤의 꿈은 정말 선명했어요. 첫 섹스의 기억처럼, 처음으로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처럼 선명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밤새워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밤새 걷고 있었지만 지치거나 피곤하지는 않았어요. 서해였던 것 같아요. 검푸른 어둠이 주위 모든 것을 삼켜 버린 동안에는 바로 눈앞까지 철썩이며 밀려왔던 파도가, 어김없이 떠오른 아침 해가 하늘을 따스한 붉은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선까지 밀려나 있었으니까요.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 마라톤 결승선처럼 아련하게 저만치에 있었어요. 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개펄로 들어가 질척거리는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다의 밑바닥이 드러나 있었어요. 파도가 지나간 곳에 세월처럼 주름살이 남았더군요. 작은 조가비들이 밤새 기어간 흔적들 위로 푸른 해초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문득 바지가 더러워졌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허리를 굽혀 뒤를 돌아보니, 역시 더러워져 있더군요. 투덜거리며 몸을 펴는데 무언가가 눈을 잡아끌었습니다.
그것은 제 바로 눈앞 개펄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푸른 불가사리였어요. 별처럼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다리 위에 얼굴처럼 선명하게 붉은 점들이 뿌려져 있었지요. 한쪽 다리 끝이 뒤집혀 있었어요. 말씀드리자면 저는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 전에는 살아 있는 불가사리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었어요. 백과사전이나 TV 프로그램에서 언뜻언뜻 스치며 보았을 뿐이었죠. 처음으로 본 그 별 모양의 생명체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워 보였습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할까요. 저는 고개를 숙여 조금 더 자세하게 그것을 들여다보았죠.
그렇게 몇 분을 있었을까요. 저는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 미끌미끌한 생명체는 바다 밑바닥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푸르고 아름다웠어요. 그건 하늘에 있어야 하는 존재였어요. 밤이면 지상을 내려다보며 빛을 내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땅에 있었어요. 바닷물이 들어오려면 한나절을 더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슬퍼서 소리내어 울며 그 불가사리를 젖은 진흙 위에서 가만히 떼어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정확한 비율로 다리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몸통 전체가 작은 단추만한 크기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빛깔이 검은색으로 변했어요. 그 아름답던 푸른색은 금세 사라져 버렸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까맣게 타들어간 심지처럼 작고 단단하게 변해 버린 그것은, 더 이상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강해 보였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것은 제 손바닥에서 천천히 움직이더니 팔을 타고 어깨를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저는 두려웠지만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했지요. 그렇게 하면 어쩐지 불경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튼튼한 빨판으로 제 얼굴에 기어오른 그것은, 제 오른쪽 눈꺼풀에 매달리더니 다음 순간 눈동자를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어요.
제 눈이 다시 불타오르고,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습니다. 눈에서 길고 날카로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어마어마한 통증이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어요. 아픔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문득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어요. 문득, 저는 더 이상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있었어요. 더 이상 꿈꾸지도 않고, 가슴 아프게 원하지도 않고, 실수를 하지도 않고, 미움으로 끓어올라 잠 못 드는 일도 없이 살고 있었어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요.
구체적인 무언가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저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때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 보곤 했지만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덩어리의 생각이었어요. 술 취한 밤에 밀려드는 서러움 같은 막연함, 디테일이 없이 몇 개의 희미한 선들로만 이루어진 스케치와도 같은 문장들이었죠. 그러나 그 문장들이 저를 견딜 수 없게 했지요. 저는 불을 켜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 슬픔으로 몸을 떨며 울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것들이 침대를 기어오르고 있었어요. 몇 시간 전 제 침대 밑으로, 책상 밑으로, 싱크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던 그것들이 어느새 다시 기어나와 있었습니다. 구보를 하는 것처럼 규칙적인 동작이었죠. 그것들은 조를 이루어 여러 방향에서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어요. 저는 비명을 지르며 팔로 쓸어버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저는 쓰러졌고 그것들은 제 오른쪽 눈꺼풀에 한꺼번에 달라붙었습니다. 그 순간 가장 두려웠던 건 그것들이 한꺼번에 총을 쏘아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모든 병사가 등에 소총을 둘러메고 있었으니까요. 작은 총이었지만, 제 눈을 멀게 만들기엔 충분한 무기였죠. 하지만 그러지 않더군요. 일단 눈꺼풀을 장악한 그것들은 단지 붉게 변한 제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작은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개의 작은 입술들이 저를 애무하듯 쪽쪽 빨아대며 눈물을 들이마시고 있었어요. 저는 무섭고 흥분됐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죠. 그러자 신기하게도 눈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눈물이 다 마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픈 생각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지요. 저는 이 모든 것이 아주 길게 이어지는 악몽의 한 부분인 양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어요.
그때였습니다. 제 오른쪽 눈이 발광하듯, 발악하듯 다시 쓰라리게 아파 온 것은. 아아악! 저는 팔을 휘두르며 다시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자 툭, 하고 무릎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제 눈에서 튀어나온 검은 불가사리였어요.
그것은 임무를 끝내고 열을 정돈하고 있던 작은 병사들 쪽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어가더니, 그것들을 깔아뭉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제 동공이라고만 알고 있던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였어요. 그 작은 것은 다섯 개의 작은 다리를 한번에 모아 밀랍 병사들을 끌어안았다가, 숨이 끊어질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몸을 조이고는 풀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침대 시트 위에 가루처럼 부서진 밀랍 조각들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지요.
곧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전장에서 여러 해를 겪은, 숙련된 병사들이 보여주는 대형으로 그것들은 빠르게 움직였지요. 그리고 사정없이 총을 쏘아댔습니다. 탕탕탕탕탕. 총소리가 제 방을 뒤흔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달려오지는 않았지요. 아마 누군가가 들었더라도 TV를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저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그 검고 작은 생명체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어요.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어요. 병사들은 수백 명이었고 물컹물컹한 그것의 몸은 총알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부드러웠습니다. 사실 이미 죽어가고 있었지요. 총에 맞은 자리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검은 체액이 쏟아져 나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곧 죽겠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이쯤에서 끝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어요. 어찌 됐건 그 검은 동물은 저를 너무나 아프게 하고 있었으니까요. 반면 병사들은 저를 위협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저를 치료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어쩌면 저는 그 짧은 단말마의 순간에, 그것들과 약간의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네, 그것들 안에는 저와 같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나 그 순간 꿈에서 저를 사로잡았던 그 슬픔의 감정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달콤한 아름다움처럼 제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무언가 바닷물처럼 짭조름한 것이 얼굴로 치받쳐 올랐고, 젖어 늘어진 해초처럼 연하고 미약한 것들이 심장을 휘감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조가비들이 기어가는 속도로, 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발을 치켜들어, 병사들을 밟아 부수기 시작했지요.
맨발에 따끔따끔하게 밀랍 조각들이 박히는 게 느껴졌어요. 아마도 피가 흐르고 있었겠지요. 그래도 저는 눈을 꼭 감은 채 그것들을 계속해서 밟아 없애버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 안도감도 밀려왔어요. 네, 그런 종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물론 전 자해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뭐랄까요, 한 명의 병사가 부서져 없어질 때마다 어쩐지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자신에 대해 말이지요.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저에게 총구를 들이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좀 당황한 것 같아 보였지요. 밀 랍 얼굴들은 작아서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같은 편에게 총질을 당한 듯한 당혹감이 대열 전체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삼분의 일 정도 병력이 손실되었을 때, 그것들은 싸움을 그만두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 구석구석, 자신들이 기어나왔던 그 어둠 속으로 감쪽같이 다시 스며들었지요.
저는 검은 체액을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작은 불가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지쳐 보였어요. 저는 그것을 손바닥에 쥔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제 오른쪽 눈동자 속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같은 일이 반복되었지요. 선생님, 제 얘기가 지루하신 건 아니겠지요? 제 눈을 보고 계시지 않으니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찌 됐건 저는 그 뒤로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졌어요. 전에는 조금도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못했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고, 그럴 때마다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쓰려 오기 시작했지요. 누군가에게 밤새워 편지를 썼던 일,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일, 저와 상관없다고 생각되어 만나지 않게 된 오랜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등을 두드렸던 일, 그리고 누구도 읽어 주지 않는 시를 쓰면서도 혼자 기쁨과 충만한 만족감에 젖어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시간이 차례로 떠오르면서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눈물을 흘렸고, 그것들은 마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제 방 구석구석의 어둠 속에서 기어나와 제 눈물을 빨아마셨고, 그럴 때마다 제 눈에서 튀어나온 검은 불가사리가 저를 대신해 그것들과 싸웠습니다. 싸움은 늘 불리했지만 이 작은 동물은 언제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요. 선생님, 불가사리에 대해 잘 아시나요? 이것들은 다리를 잘라내도 놀라운 생명력으로 곧 새로운 다리를 재생산하지요. 한번은 총에 심하게 맞아 몸이 두 조각으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때야말로 졌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대신, 그건 두 마리가 되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전 이렇게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검은 별을 갖게 되었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가 함께 싸우는 일은 불가능해졌는데, 그 놀라운 병사들이 제 몸 속에 살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가 잠든 사이, 코와 귀를 통해 제 몸 안으로 기어들어간 것이겠지요. 눈물을 흘릴 때마다 받아마시기 위해 그것들이 기어나오는 장소는, 다름 아닌 제 코와 귀였으니까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그건 두 배로 기분 나쁘고 두 배로 고통스러운 일이랍니다.
그것들은 이제 제가 집을 떠나 있는 한나절 동안도 안심할 수 없는지, 하루 종일 제 몸 속에 함께 살며 제가 슬픔을 느끼거나 잊었던 것들을 떠올리지 않도록 감시한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저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어느 정도 돌아갔습니다. 슬픈 기억이 떠오르면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지요. 슬픔을 하루 종일 달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는 눈물을 흘릴 테고, 그러면 다시 고통스러운 싸움이 벌어지니까요. 고통을 구태여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선생님도 아마 저였다면,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이제 저는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계속 살아가야 했어요. 고통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이 검은 불가사리들은 웬만해선 제 눈에서 튀어나오지 않아요. 그저 천천히 눈동자 속에서 회전하며 저를 아프게 할 뿐이죠.
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남자친구, 친구들과 직장 동료에게 저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죽음에 가장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저랍니다. 그들은 모두 저를 점점 두려워했고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피한 채였지요. 화를 내기도 했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충고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하는 말은 모두 같았어요. '그것들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이제 그만 떼어내 버려.' 몇몇은 저를 큰 병원에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제야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나 봐요.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오히려 이것들이 점점 온순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나 봐요. 어떻게 눈을 맞추지도 않고 그걸 알 수 있었을까요? 하여간 제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제가 정말 그들 모두를 죽인 걸까요? 그들의 설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매번 손으로 그들의 목을 졸랐다는 그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으니까요.
제 안에는 저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일상의 흔들림을 막아주는 작은 병사들이 있다고요. 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불가사리들이 제게 필요한 것만큼이나 저에게 필요한 존재들이었지요. 최선을 다해 제가 고통을 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리 혼란스러울 때에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어요. 비록 몇 번 정신을 잃었고, 그래서 깨어나 보면 제 곁에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 있긴 했지만,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기억해요. 두려웠어요. 두려워서 도망쳤죠. 위안을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매번 같았죠. 제가 가는 곳마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어요. 그만두게 할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요.
……선생님,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들을 죽인 건 제 눈에 들어 있는 이것들이었을까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작고 불쌍한 두 마리의 동물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걸까요?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두 눈 속에 박혀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데 말이에요. 더 이상 가슴이 시려올 정도로 푸르게 빛나지도 못하고, 마치 타다 남은 심지처럼 검고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것들인데 말이에요.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부탁드려요. 저는 어쩌면 이곳을 나가지 못할지도, 그래서 다시는 대답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답니다. 선생님, 불가사리들은 죽지 않는대요. 계속해서 다시 살아날 따름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평생 이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저는 죽는 게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알고 싶어요. 다시 한 번만 제 눈을 들여다봐 주실 순 없나요? 이것들이 정말 그렇게 끔찍한 존재인지, 제가 이것들을 키우고 있었던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한 번만 더 보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 주실 순 없나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이 어떠냐고요? 네,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났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시라고요.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들은 제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지만요. 제가 미쳤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어제는 제 앞에서 그러더군요. 만약 정신이상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형, 하늘이 도우셔서 운이 엄청나게 좋아도 최소한 종신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 저를 미쳤다고 판정해 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인가 봐요. 참, 우습죠. 그러지 못하면 저는 죽을 수도 있다니. 미친 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알아요. 지금 노트에 '다어증'이라고 쓰고 계시죠? 말이 정상보다 훨씬 많아지는 증상 말이에요. 대학교 때 심리학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 대충 알거든요. 사실 제가 생각해도 지금 전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상태예요. 보통 이런 상황에선 미친 사람들은 의사가 무슨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하지 않죠? 눈을 맞추지도 않고, 자기 얘기를 하지도 않죠? 아뇨, 이건 영화에서 본 거예요. 하하. 그러면 의사가 말하잖아요. 이거 보세요 누구 씨,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야 해요.
하지만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저는 누구보다 할 얘기가 많아요. 미친 사람의 불안 때문에 나타나는 다어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저는 미치지 않았고, 미치지 않은 상태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제 얘기를 선생님이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마지막 희망이시잖아요.
잠깐만요.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부탁이에요. 선생님, 잠깐만 제 눈을 똑바로 봐 주시겠어요? 그렇게 피하지 마시고요. 조금만 더요.
네, 됐어요. 지금 본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사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하지만 지금 대답을 듣고 싶진 않아요. 제 얘기가 끝나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말하는데 부탁드려요. 잊지 말아 주세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네, 그 일이오. 그 일이 일어난 건 1월 초의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어요. 춥고 건조한 날이었죠. 십 년 만에 찾아온 따뜻한 겨울이라고 언론에서 연신 보도를 해댄 지 한 달이나 됐지만 추웠어요. 날씨가 발악을 하고 있었죠. 마치 헤어진 연인에게 자신이 잊혀졌다는 걸 인정 못 하는 젊은 여자처럼요.
춥고 건조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눈이 아파 왔을 때 콘택트렌즈 부작용이 또 도졌구나 하고 생각했죠. 오른쪽 눈에 빡빡한 이물감이 처음으로 느껴졌을 때 말이에요. 잊을 만하면 일 년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일시적인 고질병이었거든요. 남자친구와 영화관에 들어가 아홉시 반 영화표를 예매했는데 눈이 시큰시큰 아려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를 빼냈죠. 대신 안경을 꺼내 쓴 후, 거울 속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천천히 점검했어요. 만일에 대비해 안구 충혈을 막아 주는 안약을 충분히 집어넣기도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오른쪽 눈동자에는 약간의 붉은 기운이 감돌았을 뿐 특별한 전조는 없었거든요.
남자친구는 어, 안경이야?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어요. 제 남자친구요? 이제 사귄 지 이 년이 좀 지났어요. ……살아 있다면 이 년 육 개월쯤 되었겠네요. 요즘 같아서는 오래된 커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네, 조금은 권태로워질 법도 할 만한 시기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어요. 그는 더 이상 저와의 첫 키스나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더 이상 그에게 눈물을 머금어 가며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를 건네지 않았어요. 제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나 부스스한 옷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도 않았죠. 물론 처음엔 안 그랬지만요. 그렇다고 우울하다거나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으니까. 그 사람, 저를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한때는 사춘기 소녀처럼 그런 일에 체념하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달라지더군요. 우린 더 이상 서로에게 매 순간이 찬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실이 딱히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죠. 익숙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시기였다고 할까요.
그 사람 팔을 붙잡고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어요. 영화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잊혀진 슈퍼히어로 가족이 부활하는 얘기였어요. 신나고 통쾌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이었죠. 아, 보셨다고요?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그 장면이 제일 좋았는데. 왜, 주인공이 사실은 슈퍼맨 뺨치는 초능력 영웅인데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더미에 묻혀 있는 장면 있잖아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의 커다란 엉덩이에 비해 앉아 있는 의자가 너무 작아서 참 많이 웃었던 게 기억나요. 정말이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웃었어요. 몸 구석구석의 아드레날린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 터뜨려 주는 것 같았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정말로 눈이 튀어나와 버리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안경알을 덮어 다 흐려지게 만들고도 남아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바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남자친구는 많이 당황했어요. 처음엔 제가 무언가에 감동해서 우는 줄 알았나 봐요. 재미있는 영화 보고 왜 울어?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미 제 눈은 불타는 것처럼 아픈 상태였어요. 마치 모세혈관들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 같았죠. 아마 눈동자 전체가 새빨갰을 거예요. 정상적인 눈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으니까. 그 사람 부축을 받아 집까지 겨우 돌아왔어요. 그리고 안약을 조금 더 넣고 잠이 들었죠. 웃으라고 만든 영화 보고 눈물이 쏟아지다니 참 웃기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영화,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세상에서 슈퍼히어로는 좋은 직업이 아니잖아요.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지나치게 위험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안과에 들렀어요. 의사 선생님은 예상대로 콘택트렌즈 부작용이라는 처방을 내리더군요. 그리고 일 년에 몇 번씩 들를 때마다 늘어놓던 설교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했어요. 양초 비슷하게 생긴 고체 안약을 눈에 넣고 열치료를 잠깐 받은 뒤에, 거즈를 대고 안대를 단단하게 고정시켰어요. 일 주일간 절대로 떼지 말라고 하더군요. 눈을 쉬게 해야 한다면서,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하지 말라고요. 제 눈이 특히 민감한 편인데, 너무 많은 걸 보려고 시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던가요.
선생님은 아마 지금쯤 되는 타이밍에 한 번 묻고 싶으시겠죠? 공상과학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요. 아뇨, 전 그다지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한 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중독돼 버릴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그런 영화들은 피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종류의 책들도 읽은 적 없어요. 아마 읽었더라면 이제부터 들려드릴 얘기를 좀더 그럴 듯하게 꾸며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제가 좀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렇게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 일은 실제로 제게 일어났던 일이라고요.
그날 아침 초인종이 울렸을 때, 저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두 번인가 초인종이 울렸죠. 겨우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여섯시 반이었어요. 누군가가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죠.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을 때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더군요.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면서 현관으로 다가갔죠.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현관문에 난 구멍으로 밖을 봐도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 뭔가 놓여 있었어요. 소포처럼 보이는 상자였죠. 누런 소포지로 포장돼 있었고 가로세로 삼십 센티미터, 높이 이십 센티미터 정도? 수신인 부분에 제 이름과 주소가 깨끗한 흰색 종이에 프린트되어 오려붙어져 있었어요. 발신인 자리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고요.
이상했어요. 소포를 보낼 사람 따위는 없었거든요. 친구? 전 직장 동료? 그것도 아니면 언젠지도 모르게 응모했던 온라인 이벤트 당첨 상품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발신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 아무 생각 없이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소포지를 북 찢어냈죠.
흰종이 상자 하나가 나왔어요. 시험 삼아 흔들어 보니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쌀알이나 모래알 같은 작은 알갱이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죠.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다시 매끌매끌하고 두툼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어요.
스니커즈 초코바, 처음엔 뭐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딱 그 크기였죠. 스니커즈 덕용포장 정도 되는 크기의, 불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무언가였어요. 정말이지 처음엔 누군가가 초콜릿을 선물로 보낸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안에는 무언가 작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고 겉에는 딱 한 문장밖에 씌어 있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영문으로 그렇게 인쇄가 되어 있었어요.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혹시 아세요? 그거, 노래 제목이기도 해요, 플레시보라는 그룹의. 참 이상했죠. 그 곡,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쩐지 이런 게 연상되잖아요. 신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혹시 성서에 나오는 말이던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요. 참, 전 신을 믿지는 않아요. 교회에 몇 번 나가 보긴 했지만.
어쨌든 그 소포는 이상했어요.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제목이 적힌,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면서 흔들어 보면 사락사락 소리가 나는 비닐 주머니라니. 꼭 저를 잘 아는 누군가가 보낸 짓궂은 깜짝 선물 같았죠. 요즘엔 그런 이벤트 선물 같은 거, 제작도 해주잖아요. 하지만 문제는 제게 그런 선물을 보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 일단 보낸 사람이 밝혀질 때까지 그걸 뜯어보지 않기로 했죠. 한편으론 더럭 겁이 나기도 했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좋지 않은 게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그걸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 두었어요. 그러고는 곧 잊어버렸죠. 그게 눈의 통증이 시작되기 약 한 달쯤 전의 일이었어요
……잠깐 물 한 잔만 마시고 계속해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목이 말랐거든요. 선생님은 참 친절하시네요. 하긴 그러니까 이 일을 하시겠지만요. 지금까지 이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누구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어요. 하긴 미친 사람 얘기로 들리겠죠. 제가 생각해도 조금은 미친 소리 같다는 거 잘 알아요. 선생님, 그런데요, 제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이세요? 제가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같이 보이나요? 아뇨,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제 말은, 제 얼굴에 그런 무언가가 드러나는지 궁금해서요. 거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됐거든요. 이곳에는 거울이 없으니까, 제가 어떤 얼굴인지 확인한 지도 꽤 오래됐네요. 어쩌면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안대요. 일주일이 지나서 안대를 풀었어요. 통증은 처음보다 훨씬 덜해졌지만 그때까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죠.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안대를 감싸고 있던 반창고를 쥐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떼어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오랫동안 빛이 차단되어 있었으니까. 방 안의 밝은 조명을 대하자 아주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 거울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어요.
선생님, 선생님도 지금 보고 계시죠, 제 눈을요. 지금은 양쪽 눈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오른쪽에서 시작된 거예요. 네, 검은 별이 눈에 박혀 있었어요. 검은 별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동공이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별 모양으로 변해 있었죠. 그때부터 이런 모양이 된 거예요. 이런 거 보신 적 없을 거예요. 그렇죠? 별 모양이라지만 사실 좀 웃겨요. 너무 전형적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지루할 때 연습장 한 귀퉁이에 볼펜으로 쓱쓱 그려 넣곤 하는, 정말이지 너무 별처럼 생긴 별 모양이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거울을 보고 처음엔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엔 막 웃었겠어요. 이건 뭘까, 농담의 한 종류인가?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실명도 아니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동자가 별로 변하다니요. 사랑에 빠진 순정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말이에요. 믿을 수 없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서 찬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한 뒤에도 눈에 박힌 별은 그대로였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든 과정은 이미 끝난 상태였어요. 결과만이 남아 있었죠.
다행이었던 건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더 이상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앞을 보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죠. 그냥 어느 날 한쪽 눈동자가 별로 변해 버린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 이상, 두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제 전화를 받은 그는 무슨 소리냐면서 당장 저희 집으로 달려왔죠. 그런데 현관문을 열어 주자 들어온 그가 저를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게 느껴졌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그의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그는 제 눈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내일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아. 수술하라고 하면 받아.' 그는 수술비가 모자라면 빌려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여전히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전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그는 평소와 같이 저와 시간을 보냈죠. 섹스를 하고, TV를 보고,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그러고는 돌아갔죠. 이상하게 들리세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랍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냥 제 한쪽 눈이 별로 변해 버린 것밖에는. 이렇게 말하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쩐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울거나 소리지르면서 '내 눈이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넌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거야?'라고 말해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있었어요. 마치 나쁜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말을 해야겠는데 무언가가 성대를 붙잡고 그 단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죠. 정말이지 이상했어요. 이상했지만 저는 웃었어요. 그리고 섹스를 하면서는 기뻐서 신음을 했고, 밥을 먹으면서는 맛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태를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그럴 때도 있지 않나요? 선생님은 그럴 때가 없으세요? 상황이 악화하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의 끔찍함을 눌러 버릴 때가요. 사람들의 눈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정하려는 자기 마음이 무서워질 때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에요.
돌아갈 때 보니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더군요. 어쨌거나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어요. 그날 밤, 저는 땀을 많이 흘리며 잠을 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더군요. 어차피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기에 저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일주일 전에 갔던 안과에 다시 찾아갔지요.
나이 많은 의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몇 분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눈을 바라보았어요.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저는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홀쭉하게 말라서 군살이 없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노끈으로 제 눈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죠. 그리고 눈을 돌렸을 때, 그는 다시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죠. '보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어요. '여기서는 고칠 수가 없어요. 큰 병원에서는, 거기서는 또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 결과는 같을 겁니다.' 저는 불끈 화가 치솟았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꼴을 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아직 젊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언가가 제 입술을 붙들었어요. 분명히 해결책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수술 가능성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더군요. 일 년에 몇 번 들르지 않는 병원이었지만 저는 그 나이 든 의사에게 일종의 신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거짓으로 환자를 위로하거나 반대로 두려움을 품게 만들어 치료비를 우려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제 눈에 들어 있는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그를 그렇게 어렵고 두렵게 만든다면, 아마도 없애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제가 가난하냐고요? 글쎄요. 오래 전에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렇지 않게 됐어요. 대학을 마치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고, 꼬박꼬박 적금을 붓고, 독립한 뒤 집을 조금씩 넓혀 갔고 부모님에게도 매달 많은 돈을 보내드리고 있으니까요. 직장 생활도 아주 좋았어요. 모두 제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했죠. 무슨 일을 했냐고요? 사람들의 자서전을 썼어요. 대기업 사장들이 가장 많고, 젊은 나이에 무너지기 직전의 사업을 물려받아 크게 키워 성공한,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이렇게 말하면 좀 쑥스럽지만, 전 그들의 인생을 멋진 문장으로 포장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실제로 그들은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역할은 그것을 약간 더 멋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제 인생은, 아무리 멋진 문장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어떤 한계 이상으로 빛이 날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아니, 선생님은 좀 다르시려나?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아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어요. 마치 손가락 튕기듯 말이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 일은 보수도 높았죠.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가 그 직업을 택한 것을 좋아했어요. 물론 저도 좋아했죠.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잠깐만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그런 걸 쓴 적이 있었나요? ……아, 그거요. 대학 시절 신문에 재미 삼아 썼던 거예요. 용케 가지고 계시네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자료로 보관하고 계시군요.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 시절에는 시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지 않나요?
……그 시 제목이 '불가사리'였어요? 저는 잊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아니, 읽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알아요. 저 사람들이 따라올 테니 어차피 5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잠깐 이것들이 움직였을 뿐이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까부터 계속 제 얼굴을 보지 않고 계시니까 설명해 드릴게요. 이것들은 이따금씩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해요. 다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거죠. 지금은 15도 정도 돌아가 있을 거예요. 아뇨,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처음엔 마취 없이 눈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죠. 잠들어 있다가도 종종 깨어나곤 했어요. 눈물은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눈의 흰자위 전체가 붉게 변해서 사람들은 제가 울었다고 생각하곤 하죠. 물론 저를 본 사람들은 다시는 제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되지만요.
네, 그들은 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아요. 문자 그대로 제 눈을 한번 들여다본 사람은, 다시는 저와 눈을 맞추지 못해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그것이 제가 감당해야 할 한 가지 나쁜 일이었어요. 이상했죠. 이상하고 슬펐어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거든요.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죠. 모두들 조금씩 두려워하는 것 같긴 했어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새롭게 제 영혼을 들여다보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죠. 하지만 따져 보니 전에도 제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큰 병원에는 가지 않기로 했어요. 그대로도 괜찮을 것 같았거든요. 게다가 시력은 오히려 더 좋아졌지 뭐예요.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으로만 세상을 보니 안경도 콘택트렌즈도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부모님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가 차례로 제 눈을 들여다보았어요. 공통된 게 있다면 그들이 그 즉시 그 화제를 피했고,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잘 지냈답니다. 직장에도 계속 나갔고 통증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비닐 주머니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던 도중에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문득 집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그 비닐 주머니의 파란 색 포장이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오면서, 회의 문서의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려지기 시작했죠. 저는 그 소포를 받고 석 달 동안이나 그것을 잊은 채 내버려 두었던 거예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책상 서랍을 열고 그것을 끄집어냈어요. 그건 제가 넣어둔 대로 그 자리에 있었죠. 그런데 그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처음 받았을 때처럼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면서, 무언가가 그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죠.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게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잘 알아요. 이제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거짓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다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무언가 벌레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감촉이었고, 꼭 그런 움직임이었어요. 저는 순간적으로 그 비닐 주머니를 방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러자 그것들이 스스로 비닐을 찢고 나오더군요.
네, 그것들이었어요. 저는 똑똑히 봤어요. 그것은 작은 사람들이었어요. 밀랍으로 만들어진 작은 병사들이었죠. 저마다 등에는 소총 같은 것을 둘러메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 동네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G.I. 유격대' 그 비슷한 이름의 미니어처 세트에 들어 있는 작고 단단한 병사들과 똑같이 생긴 군인들이었어요. 수없이 많았죠. 수백 명쯤 되었을 거예요. 그것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듯하다가 곧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방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침대 밑으로, 책상 밑으로, 싱크대 밑 어두운 구석으로.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이상한가요? 하지만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스르륵 하고 저마다 위치로 달려들어갔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죠. 네, 그것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청동을 녹인 액체가 스며들듯이, 불을 켠 방안에서 흠칫 놀란 바퀴벌레 떼가 어둠을 찾아 달려들어가듯이, 그것들은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제 방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어요.
꿈을 꾼 게 아니냐고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차라리 꿈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어요. 소리도 지를 수 없었죠. 저는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할 수 없었어요. 사실 오른쪽 눈이 이렇게 변해 버린 뒤로 저는 제 주위의 사람들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자칫하면 그들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들은 제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제 곁에 있었고 저는 그게 고마웠습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제 선에서 해결하고 조용히 지내는 게 좋겠다고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저는 제가 피로하고 약해져서 눈을 뜬 채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비닐 주머니를 복도 끝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다시 단단한 현실이 저를 지탱해 줄 테니까요.
하지만 꿈은 그날 밤에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도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고 지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이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가 꿈 얘기를 하며 정말 현실 같아서 가슴이 설레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고 말하면, 그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자각만 밀려왔지요.
하지만 그날 밤의 꿈은 정말 선명했어요. 첫 섹스의 기억처럼, 처음으로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처럼 선명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밤새워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밤새 걷고 있었지만 지치거나 피곤하지는 않았어요. 서해였던 것 같아요. 검푸른 어둠이 주위 모든 것을 삼켜 버린 동안에는 바로 눈앞까지 철썩이며 밀려왔던 파도가, 어김없이 떠오른 아침 해가 하늘을 따스한 붉은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선까지 밀려나 있었으니까요.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 마라톤 결승선처럼 아련하게 저만치에 있었어요. 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개펄로 들어가 질척거리는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다의 밑바닥이 드러나 있었어요. 파도가 지나간 곳에 세월처럼 주름살이 남았더군요. 작은 조가비들이 밤새 기어간 흔적들 위로 푸른 해초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문득 바지가 더러워졌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허리를 굽혀 뒤를 돌아보니, 역시 더러워져 있더군요. 투덜거리며 몸을 펴는데 무언가가 눈을 잡아끌었습니다.
그것은 제 바로 눈앞 개펄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푸른 불가사리였어요. 별처럼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다리 위에 얼굴처럼 선명하게 붉은 점들이 뿌려져 있었지요. 한쪽 다리 끝이 뒤집혀 있었어요. 말씀드리자면 저는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 전에는 살아 있는 불가사리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었어요. 백과사전이나 TV 프로그램에서 언뜻언뜻 스치며 보았을 뿐이었죠. 처음으로 본 그 별 모양의 생명체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워 보였습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할까요. 저는 고개를 숙여 조금 더 자세하게 그것을 들여다보았죠.
그렇게 몇 분을 있었을까요. 저는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 미끌미끌한 생명체는 바다 밑바닥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푸르고 아름다웠어요. 그건 하늘에 있어야 하는 존재였어요. 밤이면 지상을 내려다보며 빛을 내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땅에 있었어요. 바닷물이 들어오려면 한나절을 더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슬퍼서 소리내어 울며 그 불가사리를 젖은 진흙 위에서 가만히 떼어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정확한 비율로 다리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몸통 전체가 작은 단추만한 크기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빛깔이 검은색으로 변했어요. 그 아름답던 푸른색은 금세 사라져 버렸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까맣게 타들어간 심지처럼 작고 단단하게 변해 버린 그것은, 더 이상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강해 보였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것은 제 손바닥에서 천천히 움직이더니 팔을 타고 어깨를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저는 두려웠지만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했지요. 그렇게 하면 어쩐지 불경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튼튼한 빨판으로 제 얼굴에 기어오른 그것은, 제 오른쪽 눈꺼풀에 매달리더니 다음 순간 눈동자를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어요.
제 눈이 다시 불타오르고,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습니다. 눈에서 길고 날카로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어마어마한 통증이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어요. 아픔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문득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어요. 문득, 저는 더 이상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있었어요. 더 이상 꿈꾸지도 않고, 가슴 아프게 원하지도 않고, 실수를 하지도 않고, 미움으로 끓어올라 잠 못 드는 일도 없이 살고 있었어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요.
구체적인 무언가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저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때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 보곤 했지만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덩어리의 생각이었어요. 술 취한 밤에 밀려드는 서러움 같은 막연함, 디테일이 없이 몇 개의 희미한 선들로만 이루어진 스케치와도 같은 문장들이었죠. 그러나 그 문장들이 저를 견딜 수 없게 했지요. 저는 불을 켜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 슬픔으로 몸을 떨며 울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것들이 침대를 기어오르고 있었어요. 몇 시간 전 제 침대 밑으로, 책상 밑으로, 싱크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던 그것들이 어느새 다시 기어나와 있었습니다. 구보를 하는 것처럼 규칙적인 동작이었죠. 그것들은 조를 이루어 여러 방향에서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어요. 저는 비명을 지르며 팔로 쓸어버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저는 쓰러졌고 그것들은 제 오른쪽 눈꺼풀에 한꺼번에 달라붙었습니다. 그 순간 가장 두려웠던 건 그것들이 한꺼번에 총을 쏘아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모든 병사가 등에 소총을 둘러메고 있었으니까요. 작은 총이었지만, 제 눈을 멀게 만들기엔 충분한 무기였죠. 하지만 그러지 않더군요. 일단 눈꺼풀을 장악한 그것들은 단지 붉게 변한 제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작은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개의 작은 입술들이 저를 애무하듯 쪽쪽 빨아대며 눈물을 들이마시고 있었어요. 저는 무섭고 흥분됐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죠. 그러자 신기하게도 눈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눈물이 다 마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픈 생각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지요. 저는 이 모든 것이 아주 길게 이어지는 악몽의 한 부분인 양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어요.
그때였습니다. 제 오른쪽 눈이 발광하듯, 발악하듯 다시 쓰라리게 아파 온 것은. 아아악! 저는 팔을 휘두르며 다시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자 툭, 하고 무릎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제 눈에서 튀어나온 검은 불가사리였어요.
그것은 임무를 끝내고 열을 정돈하고 있던 작은 병사들 쪽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어가더니, 그것들을 깔아뭉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제 동공이라고만 알고 있던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였어요. 그 작은 것은 다섯 개의 작은 다리를 한번에 모아 밀랍 병사들을 끌어안았다가, 숨이 끊어질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몸을 조이고는 풀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침대 시트 위에 가루처럼 부서진 밀랍 조각들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지요.
곧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전장에서 여러 해를 겪은, 숙련된 병사들이 보여주는 대형으로 그것들은 빠르게 움직였지요. 그리고 사정없이 총을 쏘아댔습니다. 탕탕탕탕탕. 총소리가 제 방을 뒤흔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달려오지는 않았지요. 아마 누군가가 들었더라도 TV를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저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그 검고 작은 생명체는 곧 죽을 것처럼 보였어요.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어요. 병사들은 수백 명이었고 물컹물컹한 그것의 몸은 총알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부드러웠습니다. 사실 이미 죽어가고 있었지요. 총에 맞은 자리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검은 체액이 쏟아져 나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곧 죽겠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이쯤에서 끝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어요. 어찌 됐건 그 검은 동물은 저를 너무나 아프게 하고 있었으니까요. 반면 병사들은 저를 위협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저를 치료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어쩌면 저는 그 짧은 단말마의 순간에, 그것들과 약간의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네, 그것들 안에는 저와 같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나 그 순간 꿈에서 저를 사로잡았던 그 슬픔의 감정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달콤한 아름다움처럼 제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무언가 바닷물처럼 짭조름한 것이 얼굴로 치받쳐 올랐고, 젖어 늘어진 해초처럼 연하고 미약한 것들이 심장을 휘감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조가비들이 기어가는 속도로, 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발을 치켜들어, 병사들을 밟아 부수기 시작했지요.
맨발에 따끔따끔하게 밀랍 조각들이 박히는 게 느껴졌어요. 아마도 피가 흐르고 있었겠지요. 그래도 저는 눈을 꼭 감은 채 그것들을 계속해서 밟아 없애버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 안도감도 밀려왔어요. 네, 그런 종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물론 전 자해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뭐랄까요, 한 명의 병사가 부서져 없어질 때마다 어쩐지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자신에 대해 말이지요.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저에게 총구를 들이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좀 당황한 것 같아 보였지요. 밀 랍 얼굴들은 작아서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같은 편에게 총질을 당한 듯한 당혹감이 대열 전체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삼분의 일 정도 병력이 손실되었을 때, 그것들은 싸움을 그만두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 구석구석, 자신들이 기어나왔던 그 어둠 속으로 감쪽같이 다시 스며들었지요.
저는 검은 체액을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작은 불가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지쳐 보였어요. 저는 그것을 손바닥에 쥔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제 오른쪽 눈동자 속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같은 일이 반복되었지요. 선생님, 제 얘기가 지루하신 건 아니겠지요? 제 눈을 보고 계시지 않으니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찌 됐건 저는 그 뒤로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졌어요. 전에는 조금도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못했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고, 그럴 때마다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쓰려 오기 시작했지요. 누군가에게 밤새워 편지를 썼던 일,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일, 저와 상관없다고 생각되어 만나지 않게 된 오랜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등을 두드렸던 일, 그리고 누구도 읽어 주지 않는 시를 쓰면서도 혼자 기쁨과 충만한 만족감에 젖어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시간이 차례로 떠오르면서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눈물을 흘렸고, 그것들은 마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제 방 구석구석의 어둠 속에서 기어나와 제 눈물을 빨아마셨고, 그럴 때마다 제 눈에서 튀어나온 검은 불가사리가 저를 대신해 그것들과 싸웠습니다. 싸움은 늘 불리했지만 이 작은 동물은 언제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요. 선생님, 불가사리에 대해 잘 아시나요? 이것들은 다리를 잘라내도 놀라운 생명력으로 곧 새로운 다리를 재생산하지요. 한번은 총에 심하게 맞아 몸이 두 조각으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때야말로 졌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대신, 그건 두 마리가 되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전 이렇게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검은 별을 갖게 되었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가 함께 싸우는 일은 불가능해졌는데, 그 놀라운 병사들이 제 몸 속에 살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가 잠든 사이, 코와 귀를 통해 제 몸 안으로 기어들어간 것이겠지요. 눈물을 흘릴 때마다 받아마시기 위해 그것들이 기어나오는 장소는, 다름 아닌 제 코와 귀였으니까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그건 두 배로 기분 나쁘고 두 배로 고통스러운 일이랍니다.
그것들은 이제 제가 집을 떠나 있는 한나절 동안도 안심할 수 없는지, 하루 종일 제 몸 속에 함께 살며 제가 슬픔을 느끼거나 잊었던 것들을 떠올리지 않도록 감시한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저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어느 정도 돌아갔습니다. 슬픈 기억이 떠오르면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지요. 슬픔을 하루 종일 달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는 눈물을 흘릴 테고, 그러면 다시 고통스러운 싸움이 벌어지니까요. 고통을 구태여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선생님도 아마 저였다면,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이제 저는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계속 살아가야 했어요. 고통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이 검은 불가사리들은 웬만해선 제 눈에서 튀어나오지 않아요. 그저 천천히 눈동자 속에서 회전하며 저를 아프게 할 뿐이죠.
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남자친구, 친구들과 직장 동료에게 저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죽음에 가장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저랍니다. 그들은 모두 저를 점점 두려워했고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피한 채였지요. 화를 내기도 했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충고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하는 말은 모두 같았어요. '그것들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이제 그만 떼어내 버려.' 몇몇은 저를 큰 병원에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제야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나 봐요.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오히려 이것들이 점점 온순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나 봐요. 어떻게 눈을 맞추지도 않고 그걸 알 수 있었을까요? 하여간 제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제가 정말 그들 모두를 죽인 걸까요? 그들의 설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매번 손으로 그들의 목을 졸랐다는 그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으니까요.
제 안에는 저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일상의 흔들림을 막아주는 작은 병사들이 있다고요. 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불가사리들이 제게 필요한 것만큼이나 저에게 필요한 존재들이었지요. 최선을 다해 제가 고통을 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리 혼란스러울 때에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어요. 비록 몇 번 정신을 잃었고, 그래서 깨어나 보면 제 곁에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 있긴 했지만,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기억해요. 두려웠어요. 두려워서 도망쳤죠. 위안을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매번 같았죠. 제가 가는 곳마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어요. 그만두게 할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요.
……선생님,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그들을 죽인 건 제 눈에 들어 있는 이것들이었을까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작고 불쌍한 두 마리의 동물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걸까요?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두 눈 속에 박혀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데 말이에요. 더 이상 가슴이 시려올 정도로 푸르게 빛나지도 못하고, 마치 타다 남은 심지처럼 검고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것들인데 말이에요.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부탁드려요. 저는 어쩌면 이곳을 나가지 못할지도, 그래서 다시는 대답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답니다. 선생님, 불가사리들은 죽지 않는대요. 계속해서 다시 살아날 따름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평생 이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저는 죽는 게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알고 싶어요. 다시 한 번만 제 눈을 들여다봐 주실 순 없나요? 이것들이 정말 그렇게 끔찍한 존재인지, 제가 이것들을 키우고 있었던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한 번만 더 보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 주실 순 없나요?
[2005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심사평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네 편이었다.
'바람의 인상'(이미준)에서 작가는 사진 효과를 위해 음식물에 다른 물질을 바르거나 첨가하는 일을 하는 화자의 삶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생기 있게 그려냈지만, 가짜 이미지를 생산하는 자신의 일에 혐오감을 갖게 되는 과정이 우발적 사건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비판적 성찰의 거점을 놓쳐버렸다.
'식빵으로 만든 벽'의 작가(강진)는 편지투와 객관적 묘사의 교차 서술을 통해 젊은 동성애자의 심리상태를 절실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요즈음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인물유형의 특이한 존재방식에 대한 인정 투쟁만으로는 더 이상 문학적 새로움을 일구어내기 어렵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비단복어'(장영희)는 복어 요리와 관련된 세목들과 5년간 동거했던 남자의 죽음의 과정을 오버랩시키는 기법과 정갈하고 소박한 문장들은 빼어나지만,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화자에게 아무런 심리적 그늘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처리된 마무리는 주제에 대한 치열한 사유보다는 과정의 묘사에 치우쳤다는 인상을 남겼다.
'검은 불가사리'(지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이다. 이 알레고리를 푸는 하나의 열쇠는 화자의 눈 속에 파고든 별 모양의 불가사리와 그것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작은 병정들을 예술가적 자의식과 일상적 삶에 연관된 타자들의 자리에 놓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고 유지하려는 치열한 정신은 일상적 삶을 보장해주는 사람들과의 불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을 낳는다. 불안해 보일 만큼 기발한 착상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며 역동성을 잃지 않은 작가적 역량이 돋보여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황광수.박범신.오정희(대표집필:황광수)
◆예심위원=박상우.박덕규.김형경.류보선.신경숙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모두 열여섯 편. 본심대상으로는 많은 분량이지만, 전체 응모작으로 보면 1.6%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적인 풍요로 인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우수한 작품이 많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다소 빗나갔다. 많은 작품들이 세계와 문학 사이의 경계 또는 접점에 대한 치열한 탐색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재와 표현방식에서 유행적 흐름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최종심사에서는 네 편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검토되었다. 왼쪽부터 소설가 박범신오정희씨, 평론가 황광수씨.[박종근 기자] |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네 편이었다.
'바람의 인상'(이미준)에서 작가는 사진 효과를 위해 음식물에 다른 물질을 바르거나 첨가하는 일을 하는 화자의 삶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생기 있게 그려냈지만, 가짜 이미지를 생산하는 자신의 일에 혐오감을 갖게 되는 과정이 우발적 사건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비판적 성찰의 거점을 놓쳐버렸다.
'식빵으로 만든 벽'의 작가(강진)는 편지투와 객관적 묘사의 교차 서술을 통해 젊은 동성애자의 심리상태를 절실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요즈음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인물유형의 특이한 존재방식에 대한 인정 투쟁만으로는 더 이상 문학적 새로움을 일구어내기 어렵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비단복어'(장영희)는 복어 요리와 관련된 세목들과 5년간 동거했던 남자의 죽음의 과정을 오버랩시키는 기법과 정갈하고 소박한 문장들은 빼어나지만,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화자에게 아무런 심리적 그늘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처리된 마무리는 주제에 대한 치열한 사유보다는 과정의 묘사에 치우쳤다는 인상을 남겼다.
'검은 불가사리'(지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이다. 이 알레고리를 푸는 하나의 열쇠는 화자의 눈 속에 파고든 별 모양의 불가사리와 그것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작은 병정들을 예술가적 자의식과 일상적 삶에 연관된 타자들의 자리에 놓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고 유지하려는 치열한 정신은 일상적 삶을 보장해주는 사람들과의 불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을 낳는다. 불안해 보일 만큼 기발한 착상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며 역동성을 잃지 않은 작가적 역량이 돋보여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황광수.박범신.오정희(대표집필:황광수)
◆예심위원=박상우.박덕규.김형경.류보선.신경숙
지하
▶1976년 서울 출생
▶99년 연세대
▶영문과 졸업
[2005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당선 소감
"꿈이 건네준 작은 위로 그저 당혹스러울 뿐"
뜻밖의 일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감히 꿈을 품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매일의 일상을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는 일도 지금 내게는 너무나 어렵다.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때까지 과분한 꿈을 떠올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 꿈이 갑작스레 건네준 작은 위로에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언제나 외롭지만 강건하셨던 우리 어머니께, 나를 참아주고 지금까지 곁에 있어준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좋은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 재능 없는 내게 시작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물에 들어가지도 않으려 사리던 맨몸을 찬물에 밀어 넣어 주셨던 이응준 선생님, 내게는 너무도 초라하고 가난했던 그 가을과 겨울, 짧은 소설 수업을 함께 들었던 글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오만해지려 할 때마다, 내 글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잊으려 할 때마다, 다시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 촛불 같은 시간을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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