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배를 꿈꾼다 / 김성수
나는 가끔 포동포동한 돼지들이 품으로 파고드는 나태해진 일상의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유배를 꿈꾼다. 목에 칼을 차고 풀어진 정신을 주리 틀며 강원도 어느 너와집에서 배틀질하며 천이란 천마다 쪽물, 감물, 치자물 들여 널어놓고는 아라리 한 가락 목청 틔우며 어라연에 머리를 감는 버들이고 싶다.
아니다, 아니다 저 남도에 가족의 격려와 믿음으로 떠있는 섬 하나 바로 나인 것을, 땅끝 해남 대흥사의 독경 소리처럼 가라앉은 대륙붕 어디 즈음에 쑥대머리 날리며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같이, 멀미를 하며 토해놓은 푸른 정신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일이다. 질기고 질긴 인연마저도 녹슬고 순해져서 이끼를 덮었노라고, 눈멀었노라고, 슬며시 손을 놓고 밴댕이 소갈딱지로 돌아눕는 세월의 뒤란을 거닐며 야속하다는 편지에 눈물 떨구고 싶다.
바람만 불어도 제 안을 때리는 풍경의 가벼움을 병풍을 두른 두륜산같이 가슴을 벌리고 적송을 키우려면, 삭아서 뼈도 흐물거리는 젓갈의 깊은 맛을 알아야 한다. 그윽하게 남해를 바라보며 전어 굽는 냄새 아련해 벌교를 지나 보성에 있는 외가外家 근처에 초막 하나 짓고 곡우 무렵 따낸 우전차雨前茶를 달이면 율포 바다가 봄비 맞듯 자분거린다. 초의선사의 동다송을 넘기며 다산도 추사도 찻물같이 우러나 창호窓戶마다 널어둔 댓잎 그림자는 더 짙고, 그럴 듯한 서책 하나쯤 집필할 것 같다. 정신도 쩡쩡 얼어가는 적소의 겨울밤, 마당에 세운 솟대 하나도 그리움이란 걸 알면서 인기척에도 등불을 내미는 나는 그런 유배를 꿈꾼다. 권태로움에 암주岩柱를 박듯이,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하면 유치찬란한 삶도 벌떡 일어나 이중섭의 흰 소 같이 뿔을 들이미는 생을 마주 볼 수 있을는지… 내리는 눈발 속에서 둥지를 찾는 새 한 마리 여백 속을 난다.
시집 <걸음의 공식> 2010. 다시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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