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강물/안옥희
미역국을 끓이려고 간장을 떠낸다
어머니 구부러진 등에
새벽달을 지고 장독앞을 스치면
열두식구 가문 입에 물꼬가 트인다
징방망이 같은 생인손이
누렇게 고름을 만들면
잠자던 문풍지도 요란히 울었다
학교갔다 오니 주먹만한 동생이
아버지 헌 바지가랭이 속에 고물거렸다
보리밭에 고추 한 포기 실하게 났다고
퉁퉁부은 얼굴에 미소가 생성된다
미역국에 밥 한 사발 당당히 끌어당기며
간장을 가져오라는 어머니
하마같은 간장독을 여니
검게 출렁거리는 근엄한 강물속에
한 생에 굽이 하얀 결정체를 이루고
독벽에 붙어 있었다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시렁위에
일그러진 내 얼굴이
길죽하게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메주 속 보다 더 푸르게 뜬
영혼을 우리고 또 우린 진액
첫 추위가 코 끝에 맵던날
검은 강물속으로 들어간 어머니
서리서리 미역국에 모락모락
어리는 꿈결같은 얼굴
--------------------------------------------
안옥희 시인의 곰삭은 시편들은 몸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이 있다. 소개되는 작품 또한 간장을 어머니의 일생과 겹쳐놓은 빼어난 서정시로서 유년 시절의 기억속에 생생한 어머니 모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스려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보이고 있다. <어머니 구부러진 등에/새벽달을 지고 장독앞을 스치면/열두식구 가문 입에 물꼬가 트인다>에서 보듯 고단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어머니는 늘 사랑으로 충만하여 간장 반찬 하나로도, 찬 밥에 물 말아 먹어도 배 부르고 겨울에도 춥지 않다.
<첫 추위가 코 끝에 맵던날/검은 강물속으로 들어간 어머니/서리서리 미역국에 모락모락/어리는 꿈결같은 얼굴>처럼 안옥희 시인은 떨치고 싶은, 그러나 떨칠 수 없는 어머니의 길을 자신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내일을 향해가는 희생적 세계관이 시 곳곳에 함축되어 있다. 온갖 이야기 다 들어주며 함께 웃고 울어 줄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자식은 어머니를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언젠가는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욕망이 있을 것이다. (최주식 시인)
'詩評·컬럼(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사랑/설덕환 (0) | 2011.11.16 |
---|---|
자원봉사를 하다보면/최주식 (0) | 2011.11.09 |
바람이 분다/ 김성덕 (0) | 2011.10.26 |
빗, 빚./ 윤인자 (0) | 2011.10.19 |
시민과 함께 하는 서정문학 시화전 및 시낭송 (0) | 2011.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