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월면 체굴기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류성훈 당선소감"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 같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할 것"
바다 건너에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라는 옛 검술이 있다. 그 창시자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오직, 다 버리고 초연하게 내던지는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
아직 미숙한 내게 등단은 그런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으로 찾아왔다.
숨을 고르며 새삼 뒤돌아본다. 문학을 배우겠다고 덤빈 날이 어느덧 두 자리 햇수를 넘겼을 때, 내 앞의 시는 노력과 버림 사이에 있었고 초연함과 무덤덤함의 사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희망이 없어도 캐어낼 순 있었고, 오랜 그늘 속에서도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로 내려앉은 것 같은 지금의 느낌을, 나는 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가 아닌 ‘시’인 것이라고 뜨겁게 한 번 우겨보려 한다.
나의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들, 부족한 내게서 재능보다 노력을 높이 보아주셨을 고마운 분들에게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행복한 걱정이 앞선다.
문학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주신 김석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권혁웅 조연호 선생님을 비롯한 금요반 모든 시인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우들에게 이 행복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이젠 내가 이 따뜻한 빚을 갚아나갈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늘 촌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마음.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설치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불만도 없이 끝까지 믿음을 주셨던 부모님께, 차마 부끄러워 표현할 수 없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행복하게 전하고 싶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류성훈 인터뷰 - 송용창기자
"언어로 만드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시라고 생각해"
"언어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정점에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요."
외로움과 용기 없이는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지만, 시를 향한 열정은 여전히 높고 단단하다.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류성훈(31)씨도 그렇다. 고등학교 시절 백일장 수상을 계기로 문창과에 입학한 후 한결같이 시만 쳐다보고 왔다는 그는 "언어로 만드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시"라고 강조했다. 인간의 사유가 언어로 구조화돼 있고 예술의 기반이 결국 언어라면, 그 언어의 정점에 있는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소신이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류씨는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시 연구자. 백석의 근대성과 향토성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간 여러 차례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올랐다가 고배를 마셨던 그가 등단의 소식을 듣게 된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류씨는 "포기하고 있던 차여서 믿기지 않았다"며 "마침 집에 함께 있던 아버지와 얼싸안고 울었다"고 쑥스럽게 말했다.
등단의 꿈을 안긴 당선작 '월면 채굴기'는 뇌종양 수술을 받는 부친의 모습을 달 표면의 채굴에 비유하는 발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예전에 친척 한 분이 뇌종양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하늘의 달을 보면서 착상하게 됐다"며 "힘든 세상에서 구슬프게 이어져온 가족애를 담아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시가 좋아서 들어선 길인데, 앞으로 바보처럼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심사평"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황지우(가운데·시인) 정일근(오른쪽·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사진 박서강기자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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