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북을 치는 사내가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버려진 언덕. 땅에 떨어진 밥을 주워먹고, 가파른 비탈에서 비료푸대를 타고 미끄럼을 타며 소일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모두가 순대 빛깔의 얼굴을 지녔다. 이들은 혼혈족이다. 순혈족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땅에 응보(윤정섭)란 아이가 태어난다. 그는 날 때부터 천재였다. 문계(이원재)는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한다.
"나는 약해. 울보야"라 말하는 응보에게 문계는 "왕은 사방의 울음에 휩싸인자"라 답한다.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처지에 비분강개한 문계는 혁명을 꿈꾼다. 결국 신화의 힘에 기대어 응보가 북을 치게 만든다. 왕은 그렇게 세워진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전쟁뿐이다.
김지훈 작ㆍ김재엽 연출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견디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하다. 4시간의 연극이다. 긴 시간보다 힘든 건 이 문제작의 밀도였다. 몇 편의 연극을 합친 것만큼 치밀했다.
서막은 유쾌했다. 극장에서 썰매를 타는 모습을 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전개도 독특했다. 기승전결의 리듬이 아니었다. 1막의 끝에서 왕을 세우며 클라이막스를 찍은 극은 다시 2막에서 평온한 서사로 귀환했다. 두 번의 절정이 찾아왔다.
몇 번을 곱씹어도될 질기디 질긴 텍스트였다. 10년, 20년 뒤 한국의 모습일지도 모를 이야기. 고대의 공간에서 말하는 이야기에는 풍자도 해학도 넘실댔다. 상징과 신화를 벗겨내 섭취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이었다.
게다가 `풍찬노숙`은 공연장 전체가 무대다. 가파른 객석을 무대로 바꾸고 무대에 의자를 놓은 덕이다. 관객의 머리맡에서, 뒤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배우들은 360도의 입체적인 동선을 마음껏 활용했다. 숨가쁘게 움직이는 조명과 어딘가 구슬픈 음악도 더해졌다. 이 극은 단지 20대에 `원전유서`로 연극상을 휩쓸었던 괴물 작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위적인 스태프들이 한데 모여 빚은 뒤범벅된 잡탕같은 극이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다. 혼돈스러웠다. 허리가 아프고 사변적 대사덕에 종종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종반부를 향할수록 힘있는 극의 얼개와 선명하게 구축된 캐릭터는 빛을 발했다. 2막의 중반부까진 유머러스하고 낭만적으로 흐르던 극은 마침내 결말에서 둔중한 한 방을 날렸다.
(기사출처/ 1월 25일 (수) | 매일경제 | 미디어다음 김슬기 기자)
마지막 자락. 혁명을 꿈꾸고 전쟁에 나왔던 백만군대는 결국 스러졌다. 마치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커튼콜에서 보여준 희망은 그래서 반가웠다. 막이 내리자 박수가 쏟아졌다. 한동안 다시보기 힘들 담대한 작품의 탄생이 반가웠다. 2월 12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
'♣ 일상사진 > 연극전시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뮤지컬 두근두근 (0) | 2012.02.19 |
---|---|
思悼-사도세자이야기/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 | 2012.02.11 |
카타리나 쿨리코바 듀오 리사이틀/예술의 전당 챔버홀 (0) | 2012.02.02 |
아프리카에서 죽기 (0) | 2012.01.31 |
시와 음악이 있는 김경복 시 낭송 콘서트 / 아낌없이 주는 나무 (0) | 2012.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