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대개 ‘시는 OOO이다’이라고 기술한다. 하지만 시인의 세계가 학문의 세계와 같을 수는 없다. 몇 줄의 시가 시론을 대신할 수 있다. 이를테면 프로 시인의 시론이란 이런 것이다.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누군가 정(釘)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익산고도리석불입상)
안도현(51) 시인의 신작시집 『북항』(문학동네)에서 골랐다. 시인은 석상을 보면서 시인과 시의 관계를 떠올렸다.
시는 시인의 애인인 셈인데, 그 애인은 단단한 바위 속에 숨어있다. 지금 시인에게, 시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모순적 실체다. 그래서 시인은 정(釘)으로, 그러니까 언어로 단단한 시의 외피를 깨뜨린다. 문제는 그렇게 불러낸 애인이 정작 시인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은유의 시론이다. 안도현에게 시는, 현상의 세계에서 시 아닌 것을 깨뜨림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 지은 그 시들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또 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 소출이 도무지 형편없다”는 ‘시인의 말’은 그저 겸양으로 읽자. 문학사이는 이 시집의 첫 장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으니까.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일기)
참으로 하찮은 세계 아닌가. 국화꽃의 눈썹을 다듬고,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쓰고, 감나무 그늘을 바로잡는 일은. 안도현의 세계에서 인간과 미물은 서로 소통한다. 저 상상력은 뭉클해서, 고장 난 우리 영혼도 수리되겠다.
세상에는 시만큼 쓸모 없는 일도 드물지만, 시만큼 절박한 일도 없다. 안도현의 시론은 시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절박함에 근거한다.
덧붙이자. ‘일기’는 2011년 문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안도현에게 ‘이것’은 시 말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