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

시인 최주식 2012. 6. 10. 22:49

[시가 있는 아침] 묘비명



묘비명(墓碑銘) - 김광규(1941~ )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며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시도 소설도 읽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그러고도 큰 부자에 높은 권력자인 사람은 드물게 보았다. 그중 한 사람을 안다. 그의 눈빛을 보고 알고, 말을 듣고 알고, 행동을 봐서 안다. 그는 사람이 그저 사람 말을 듣는 데도 괴력이 필요함을 알게 해주었고, 골방의 문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 제 무덤도 제 돈으로는 짓지 않을 터이니, 어떤 무명작가도 그의 비(碑)에 붓을 대지 않을 것이다. 천한 것이 언제나 더 강하게 욕망한다. 역사는 아무것이나 기록하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무덤이 필요 없다.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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