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론(詩評論)

사물(事物)의 꿈 1 / 정현종

시인 최주식 2012. 8. 11. 22:28

사물(事物)의 꿈 1 /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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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자연과 예술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노장적(老莊的) 세계인식과 접맥된다. 만물은 하나라는 것이 장자의 일관된 사상이며, 노자 역시 만물이 그 근본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는 도(道)를 이야기한다. 정현종에게 시는 삶의 숨결이고 자연의 숨결이다. 우주의 숨은 바람이며 시의 숨결은 원초적 자아가 회생하는 공간이다.
첫 시집 『사물의 꿈』에서 보이는 정현종의 주된 관심은 사물과의 친화력에 주어진다. 그 자신이 사물이 된다는 꿈이 바로 그것이다. 슬픔을 녹이고 사물을 녹이듯이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무화(無化)시키겠다는 시적 의지는 정현종의 초기시 「사물의 꿈」 시편들에서 계속된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무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햇빛과 입 맞추며, 내리는 비와 뺨 비비고, 가지에 부는 바람에서 나무 스스로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무의 꿈이 화자의 꿈이었던 것이다. 아니 나무를 통해 자신의 꿈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나 자신 내가 노래하는 그것이 될 수 없다는 사정 때문에 한때 나는 매우 슬퍼했고 그것이 또 시인의 비극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실은 이 지점에서 시는 탄생합니다'라는 정현종의 고백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 자신이 노래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슬픔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이 곧 시가 생겨나는 자리임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사물들의 화음을 들을 수 있게 되며, 그 환희에 찬 교감(交感)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6행에 불과한 이 짧은 시에는 주위의 사물들과 어우러져 혼연일체가 된 싱그러운 나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하는 나무는 원래 움직임이 없는 정적(靜的)인 존재이다. 그러나 나무는 햇빛과 비와 바람과 더불어 교류하며 움직임을 가진 하나의 소우주가 된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힘을 꿈꾸'는 나무는 얼마나 활기차고 역동적인가. 실제로 빛은 나무의 성장에 빼 놓을 수 없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또한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꾼다'. 비와 피는 모두 물의 이미지로 생명의 근원과 연관된다. 비는 나무에 스며들어 `나무의 피(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을 비유)'가 되는데, 이 `피'의 이미지는 나무의 뜨거운 생명력을 생생하게 연출하고 있다. 끝으로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뭇잎들이 서걱이는 소리를 `생이 흔들리는 소리'라고 표현한 시인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나무는 주위의 세계와 교류하며 커 가는 소우주일 뿐 아니라, `자기의 생(生)'을 부여받은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시인과 나무와의 뜨거운 교감이 없었다면 쓰여지지 않았을 이 시는 교감의 진정성을 행간에 감추어 둔 채 독자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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