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時調)창작법

시의 틀과 말의 변주(變奏)

시인 최주식 2012. 8. 14. 00:41

시의 틀과 말의 변주(變奏)
―『갈대 속의 비비새』를 읽으며


宋在英
(충남대 불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1
주근옥의 『갈대 속의 비비새』를 주의 깊게 읽으면서 나는 뜻밖의 경이로움과 미묘한 감동을 경험하여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지난 해 발표된 이 시인의 『바퀴 위에서』에 관해 그 동안 내가 품고 있었던 견해가 혼란에 직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그를 이 시대의 모순을 희화적으로 고발하는 쉬르레알리스트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의 시정신과 시적 기법은 한국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서구적이고, 따라서 시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태도 역시 전통적이기보다는 코스모폴리턴하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갈대 속의 비비새』는 기왕의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고 말았다. 이 시집에 수록돼 있는 작품들은 소재와 어법, 또한 형식과 율조에 있어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한 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퀴 위에서』부터 『갈대 속의 비비새』까지는 불과 일년이라는 짧은 기간이 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신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은 시인으로서의 변모가 아니고 원래의 모습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근옥은 『바퀴 위에서』에 감추어졌던 세계를 이제야 꺼내 보일 뿐이다. 어찌 『갈대 속의 비비새』가 일년 동안에 이룩된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본시 이 두 시집에서 볼 수 있듯이 상반되고 모순된 두 세계가 내재해 있었을 뿐이다. 아니, 그것은 결코 상반되고 모순된 세계가 아니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한 시인이 거쳐야만 되는 피할 수 없는 시의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2
『갈대 속의 비비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특징의 하나는 짧은 시들이 많이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 근대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삼행단가(三行短歌)와 흡사해 보이기도 하는 주근옥의 단시들은 그러나 분명 자신만의 독창성을 견지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간단히 말한다면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단가들이 시인 자신의 예민한 감성과 서정을 표출하고 있다면 주근옥은 철저하게 자아를 절제하며 관조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근옥의 단시는 지극히 짧고 간결하다. 열자 미만의 시행, 거기다 불과 3행으로 구성된 그의 단시는 그 형식상 단일한 구조와 또한 단순한 주제를 담고 있다. 사실 그것은 단시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주근옥은 이 한계를 과연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한계의 특성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이 점에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신축 빌딩 용접공
올려다보고 있는 누렁이
목덜미 상처에도 눈발이

이상은 「눈발」의 전문인데, 짧은 형식에 비해 참으로 많은 시적 진술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각 시행마다 구체적인 시적 대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제1행에서는 <용접공>, 제2행에서는 <누렁이>, 제3행에서는 <눈발>이 제시되어 그 동작 혹은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사실 이들 세 시적 대상은 그것들을 이렇게 병렬적으로 배열하여야 할 필연적인 논리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로서 아무런 상호 관련성 없이 그저 그렇게 제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셋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 시라는 틀 속에 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발」을 읽으면서 순식간에 눈앞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회화적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느 신축 공사 현장―높은 곳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는 용접공의 모습을 신기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누렁이. 때마침 희끗희끗 내리는 눈발이 그 누렁이의 목덜미, 그것도 하필이면 상처 난 목덜미에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산문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눈발」의 시적 메시지는 어떤 내연적 진실을 담고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의 표면은 비록 고요하고 평화롭게 눈이 내리는 풍경일지라도 내면에는 치열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그래서 상처받기 일쑤인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근옥은 시의 운율적 효과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인데, 이러한 점은 「눈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예컨대 둘째 행 <올려다보고 있는 누렁이>와 셋째 행 목덜미 상처에도 눈발이>(밑줄 필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로 각운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눈발이>라고 조사만 붙인 미완성 문장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러나 이 미완성 문장은 첫 행과 대비되어 용접공의 목덜미에도 눈발이 내리고 있음을 충분히 암시해 주고 있다. 그 결과 <이∼이>의 각운은 또한 의미론적 효과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눈발」이 현실의 한 단면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면 「홍시」는 하나의 자연 정경을 형이상학적으로 연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기서도 제1행의 <범종>, 제2행의 <산기슭>, 제3행의 <홍시>는 아무런 논리적인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범종의 울림을 종교적 차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매체로 도입함으로써 어느덧 산기슭이 붉게 물들고, 시퍼렇던 감이 벌써 홍시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자연 현상에 대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통찰력은 오랜 시기에 걸친 시적 명상 끝에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주근옥 단시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의 하나는 자연과 문명의 공존 현상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문명의 침범으로 설자리를 잃어버린 자연의 황폐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 하구 공장 굴뚝
연기 아래 갈매기가 날고
그 아래 해가 집니다
―「낙조」


장구벌레가 꿈틀거리는
염색 공장 그늘 웅덩이
별도 뜨고 달도 뜨네
―「장구벌레」


베란다 플라스틱 화분
흙 위에 알을 낳고 품고 깨고
먹이를 물어 나르는 황조롱이
―「황조롱이」

위 세 편의 시들은 한결같이 자연과 문명의 어색한 만남이 야기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부조화, 그러나 또한 분명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①이 보여주는 정경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깨끗한 강 하구나 넓은 바다 위를 날아야 할 갈매기가 <공장 굴뚝 연기 아래>를 난다는 것은 앞서 말 한 대로 자연과 문명의 우스꽝스러운 부조화의 한 단면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②와 ③의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염색 공장 그늘진 곳에 웅덩이가 움푹 파여, 그 속에서 장구벌레가 꿈틀거리는가 하면 또한 <별도 뜨고 달도> 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숲 속 으슥한 곳에 둥지를 틀고 <알도 낳고 품고 깨고>해야 할 황조롱이가 <베란다 플라스틱 화분>을 둥지로 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깨는 혼란스러움이며, 가까운 미래에 인류에게 닥쳐올 그 어떤 재앙의 징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주근옥은 이렇게 뒤틀려가고 있는 자연의 질서를 담담한 자세로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근옥은 결코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하기야 복잡하고 미묘한 자연의 온갖 현상에 대해서 시인인들 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저 저명한 현상주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세계에 관하여 내가 그 어떤 분석을 시도하기 이전부터 세계는 지금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관하여 일련의 총론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현실은 묘사할 뿐이지 구축하거나 구성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시와 철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분야를 떼어놓고 완전히 독립된 세계로만 취급할 수도 없다. 특히 현상학이 근대 심리학과 상징주의 시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시만을 놓고 볼 때 주근옥은 현상주의자이다. 그는 분석하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런 행위를 그의 시를 읽는 독자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근옥은 메를로 퐁티의 말대로 오직 <현실을 묘사할 뿐이지>, 그것을 기하학적 잣대로 분석하거나 사변적 논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이와 같은 그의 시적 기법은 단시의 형식적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하다. 총 설흔 자 내외의 짧은 시의 형식은 극도의 언어적 압축을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의 옛 시인들은 한시나 고시조를 통해서 이러한 시의 기법과 정신에 익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주근옥의 단시가 고시조와 언어적 동족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한다면 고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의 세 연을 통해서 일종의 기(起), 승(承), 결(結)과 같은 형식에 바탕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적 결과로 인해서 시조는 삼단논법적 진술을 즐겨 한다. 그것은 시적 대상을 설명하고 정의함으로써 시인 자신의 윤리적 또는 심미적 태도를 당당히 진술한다. 그런데, 주근옥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적 대상을 결코 설명하거나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제시하고 묘사할 뿐이다. 그는 자연 현상, 말하자면 사물의 변이를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서술할 뿐이다. 고시조가 주로 직유적 방법을 원용했다면, 주근옥의 단시는 반대로 환유적 기법에 입각해 있는데, 이 점은 바로 위와 같은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3
『갈대 속의 비비새』의 1, 3부는 앞에서 살펴 본 단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시들을 싣고 있다. 그것들은 대다수 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일정한 서사성을 도입하고 있으며, 또한 민요적인 가락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발라드 시풍(詩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서구풍의 발라드와는 다른, 주근옥의 특유한 감각과 정서를 보여주는 일종의 네오 발라드(Neo-ballad) 즉 신담시(新譚詩)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은 얼핏 보아 이상의 「오감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듯이 「문」은 한 사내가 일곱 개의 문을 들락날락하면서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자기 집 앞에 이르러 초인종을 누른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 사내를 알아보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니, 사내는 지금도 자기 집을 잘못 찾은 것인가? 아니면, 사내가 짜증스럽게 (이봐, 하말순 여사 당신 뭐 잘못 먹었어/왜 이래 이거 당신 맛이 간 거야>하고 말하듯이, 그의 아내가 어떤 착란증에 빠져 있는 것인가? 이러한 반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 누구도 확연한 답변을 내릴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시의 퍼스나인 한 사내와 그의 아내가 현대 도시 생활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미망 가운데서 헤매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고단한 생활을 헤치며 떠돌다 돌아온 사내, 오랜만에 집을 찾아오니 비슷비슷한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방황할 법도 하다. 그의 아내도 오랜만에 대하는 남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할 수 있으리라. 넌센스에 불과한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그러나 주근옥의 언어 변주에 의해 일순 우리를 실소토록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다. 물론 이 카타르시스는 작품의 치밀한 해학적 구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주근옥은 왜 이토록 삶을 신랄하게 희화하기를 즐겨하는가? 「문」의 여백에서 우리는 이런 지문을 읽을 수 있다.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의 삶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작품은 「튀밥 장사 어 서방」이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이 담시로서의 형식 요건을 여러모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30여 행의 긴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전문을 인용할 수는 없지만 그 개요만은 소개하여야 될 것 같다. 튀밥 장사 어 서방은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튀밥 튀기를 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다가 마침내 비단 장사로 변신한다. 그는 혼인도 하고 돈도 벌고 살림 형편이 차츰 풀리게 된다. 극장도 사들이고 빌딩도 세우고…, 그러나 슬슬 재미 좀 볼만하니까 쓰러지고 말았다. 당연히 그의 부인이 그의 빌딩을 물려받고 그의 처남은 극장 주인이 된다. ―단편 소설 한 편의 제재로도 충분한 듯한 이 이야기 꺼리는 담시가 요구하는 서사성으로는 오히려 용량초과라고 볼 수 있다.
「튀밥 장사 어 서방」에서는 전통적 담시에서 흔히 사용되던 후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같거나 비슷한 어구(語句)나 율조의 반복을 통해서 담시로서의 흥을 살리고 있다.

그 짐이 점점 커져 가게를 사서 부려놓고
그 비단 가게 더 점점 커져 읍내에서 제일 큰
극장이 되고, 대전의 빌딩이 되고
슬슬 바람도 피운다는 유언비어가 나도는 어느 날
그는 쓰러졌다, 팔아먹은 것보다 더 큰 금반지를 끼고
그는 쓰러졌다, 남들 다 가는 평양 구경 본처 상봉 못하고
빌딩의 주인은 그의 부인 이름으로 바뀌고
소달구지 끌고 매형 집을 오가던 그의 처남은
극장 주인이 되었다, 달아 달아 노오란 강냉이
시멘트 물 바닥에 낳은 개구리 알속의 보름달아
(밑줄―필자)

위 밑줄 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주근옥은 같은 어구의 반복을 통해서 시적 흥취를 돋구고 또한 민요적인 가락을 살림으로써 담시로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각운의 배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시의 전반적인 음악성을 아름답게 또한 대칭적으로 조율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보름달 만한 호떡을 팔아도 돈이 되지 않아 (가)
목숨보다 귀한 노란 결혼 금반지 빼어 팔아 (가)
대구에 가서 튀밥 기계 사다가 (나)
읍사무소 뒷마당에서 뻥뻥 튀밥을 튀다가 (나)


달빛 드는 방에 쭈그리고 앉아 부대를 풀어놓고 (다)
구겨진 돈 펴 세고 있던 그는 저녁도 냉수로 때우고 (다)
아침도 선 돌밥으로 때우고 점심도 거르다가 (라)
하루는 이혼하고 혼자 산다는 여자를 데려와 (라)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가∼가), (나∼나), (다∼다), (라∼라)의 각운이 연속적으로 배열돼 있다. 다만 (라∼라)의 경우 (가∼와)의 배열이어서 형식상 약간 틀린 듯하지만 Ka와 Kwa는 같은 음운군(音韻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각운법은 서구의 담시나 장시에서는 일찍부터 구사되어 온 것으로 흔히 평운(平韻) 혹은 대운(對韻, Rimes plate)이라고도 불린다. 아마도 긴 시에서는 같은 운을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간편하게 느꼈을 터이고 또한 그것이 숨을 고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담시는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기타를 치면서 읊기 위해 쓰여진 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가락을 조율하고 각운을 적절히 배열하면서 한 편의 담시를 엮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여 자칫 시적 균형을 잃을 위험성을 배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겉만 그럴 듯하게 꾸미느라고 속을 허술하게 메꾸기 쉽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근옥은 「튀밥 장사 어 서방」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담시의 한 정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시적 감동과 흥분을 한 두어 마디로 간단히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간추려 말한다면 우리는 이 시에서 익살과 해학, 흥취와 가락―말하자면 한국인 특유의 한판 놀이마당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놀이마당이 아니다. 시인은 어 서방의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서 인간조건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의 특유한 기법으로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비극적이다. 「튀밥 장사 어 서방」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 않겠는가? 요컨대 『구약성서―시편』에도 적혀 있듯이 <허무하도다, 허무하도다.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로다.>라는 깊은 탄식을 다시 한번 읊조리게 할 뿐이다.

4
『갈대 속의 비비새』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풀무가 序詩」라는 한편의 민족 서사시이다. <풀무>란 오늘날엔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장간이나 실제 생활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풀무가 序詩」란 민족의 뜨거운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상징하고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그렇다. 「풀무가 序詩」의 구성은 굉장히 방대하고 그 노래는 힘차다.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삼국 건립의 과정,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의 역사까지를 섭렵하고 있는 이 서사시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엄한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일찍이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서사시를 통하여 형상화하려고 시도하여 『세기의 전설』을 쓴 바 있다. 자그마치 1만 행을 훨씬 넘는, 아마도 세계 문학사상 가장 방대한 서사시일 것이다. 고대 신화 시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인류의 역사를 문화사적 각도에서 조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구를 중심으로 한 인류사적 서사시이지, 결코 세계사적 서사시가 아니며, 더 더욱 한국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이에 반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주근옥의 「풀무가 序詩」는 면면히 이어져 온 한민족의 혼을 풀무질로 불어넣으려고 애쓴 민족 서사시이다. 그러나 3백 행 미만의 「풀무가 序詩」를 통해서 5천년 역사를 점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주근옥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으로 자리잡아 온 고대 신화와 설화를 주로 제재로 삼기로 한다.

풀무야 가자 신시로 가자
순한 눈매의 바람이 매달린
신단수 아래로 어서 가자
상제께서 내려보내신 아들
풍백 우사 운사 만나보자 …
웅녀는 아들을 낳았네
그가 곧 단군이니
나라 다스리기를 일천 오백 년
살기를 일천 구백 팔 년
허허 산신이 되었네
어화어화 어화어화
어여차 어여차 굴러라 굴러라

이렇게 시작되는 「풀무가 序詩」는 동부여 건국 신화, 서라벌 계림과 박혁거세에 얽힌 설화, 신라 신문왕과 만파식적(萬波息笛)에 관한 설화, 백제 무왕의 탄생과 선화공주와의 설화적 로맨스, 궁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고려 왕조의 건립에 따른 불교의 부흥, 그리고 신궁 이태조에서 전봉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잇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는 설화적 사실과 전환기의 역사적 사건만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지라도 3백 행 미만의 「풀무가 序詩」로써 그것들을 다 포용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근옥은 상징적 또는 회화적 묘사의 기법 대신에 효과적인 가사(歌詞) 전달의 창법(唱法)을 택한 것 같다. 그렇다. 「풀무가 序詩」는 이미 그 제목의 가(歌)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창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경쾌하고 멋드러진 창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구의 마지막 두 행만 보아도 그렇고 또 다음에 인용하는 이 작품의 종결 부분도 그러하다.

오오 파랑새가 된 넋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조 고부 녹두새야
어화오화 어너리 넘자 어여라
저 건너 불머리 쾅쾅 굴러라

민요와 창은 한국인의 원초적 정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근옥이 「풀무가 序詩」에서 전적으로 이러한 기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설화를 통해서 정신적 원형을 탐색하기보다는 정서적 원류를 노래하고자 했음을 뜻한다.
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풀무가 序詩」가 주근옥이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민족 서사시의 완성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시도이며 출발일 뿐이다. 생각하건대 그는 여기서 제시된 민족 설화를 개별적으로 더욱 심화하여 보다 방대한 서사시를 집대성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풀무가 序詩」는 미완성의 서사시이며, 나 또한 「풀무가 序詩」에 대한 해설을 미완성으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5
주근옥은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는 시인이다. 그는 앞으로도 시를 쓰는 한 계속 실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시는 곧 실험이고 또 거꾸로 말해서 그의 실험은 곧 시 자체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시가 고뇌의 대변임을 뜻한다. 넓게는 이 세계와 인류에 대해서, 좁게는 이 사회와 자아에 대해서 그는 계속 반문하고 회의한다. 그는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쫓기듯이 방황한다. 그러면서 사방으로 시의 문을 찾아다닌다. 마치 시에 의해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하듯이…. 그러나 시의 문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먼지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