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선이 닿는 곳 - 조 영 미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문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가 분분했었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환경이나 생태 등으로 일괄되어지는 자연 친화주의적인 문학지향인 것처럼 보인다. 각 문예지나 세미나 등을 통해 발표되는 환경시나 생태시 등의 양적 증가는 21세기의 문학이 환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논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논의들이다. 왜냐하면 환경 생태 파괴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에는 현재보다 그 심각성이 덜했을 뿐 언제 문학이 환경이나 생태를 떠나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동안 논의되어져왔던 환경 생태 문학의 논의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이 아닌 자연중심적인 사유이다. 이러한 사유체제는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준 사고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즉, 과학적인 사고에서 시작된 문명의 발전이 계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연과 대립하게 되고, 그 결과 기상이변이나 재해 등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기 시작하자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기 위해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자 노력한다. 시인은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시를 통해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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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시나 생태시처럼 거창한 이름은 아니더라도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의 상당수는 기계화되고 오염된 세계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는 암울하게 그려지고 현재의 삶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형된다. 과거의 풍요로웠던 자연은 현재의 피폐해진 자연을 안타깝게 바라보도록 만들어 다가올 미래를 더욱 불안스럽게 한다.
자연을 주제로 씌어진 시라고 해서 꼭 문명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를 오늘의 시로 쓰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시는 정치 사회 문제일 수도 있고 오염된 자연환경 문제일 수도 있으며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시는 시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 오늘의 시로 씌어지기 때문에 시인의 관심정도에 따라 각양각색의 시가 씌어지기 마련이다.
{시와산문} 여름호에 실린 몇몇 작품들은 굳이 자연이라는 주제를 갖지 않더라도 시 속에서 충분히 그 맛을 살려내고 있다. 다만, 시선의 깊이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나는 가끔 도로 위에서
고양이들의 풍장을 본다
달려오는 자동차의 굉음 속으로 뛰어든
고양이의 발정난 울음,
그 후 고양이는
무수한 문명의 바퀴에게
제 살을 하나씩 떼어준다
<중략>죽은 몸으로도 끝내
오고 가는 문명의 속도에 선뜻
제 몸을 떼어 줄 수 없는
저 망설임의 중립,
――박남희의 [중앙선 위의 고양이] 일부
사회가 기계화 문명화될수록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자연이다. 인간의 편익을 위해 발전하는 사회는 자연의 밑바닥부터 서서히 잠식해들어가 끝내는 인간의 목을 죄어온다. "오고 가는 문명의 속도에 선뜻/ 제 몸을 떼어 줄 수 없는/ 저 망설임의 중립,"은 인간들의 중립이다. 즉, 원시의 풍요로움 속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더 이상의 계발도 힘들기 때문에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박남희의 [중앙선 위의 고양이]는 "풍장을 거부하는 고양이의 주검"처럼 "햇빛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지막 연으로 인해 시선의 깊이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단지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바라보는 데에 시선이 머물러 있다면 시의 깊이 역시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시선은 결국 사유의 시선이 먼저 가 닿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어둠도 하늘에서 내려온다
앞산이나 건물의 가장 높은 꼭대기부터 잠식하여
빌딩과 아파트의 절반만 어둠 속에 기우뚱하다
나도 반쯤 잠기어 어둠 위로 고개를 내민다
집집마다 통통 튀어 오르며 불이 켜지고
상가지역에선 일제히 불꽃놀이로 현란하다
모두 퇴근해버린 사무실의 정적이
내 몸 속을 텅텅 울릴뿐
여기서 보면 암흑의 바다 속을
형광의 어군들이 헤엄치는 듯
지상은 싸리꽃이 흐드러진 군락지,
뿌옇게 솟아난 화려한 산호섬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뱃길이
나를 밀어올리고 내렸던 닻에 묶여
몇 마장의 거리로 더 멀어졌는지 몰라도
어두워질 때 비로소 더 환해지는 뱃길
조수간만의 차이만큼 떠올랐다
다시 내려않는 게 희미하게 보인다
――김동수의 [어두워질 때] 전문
김동수의 시선은 도시의 어둠에 닿아있다. "자세히 보면 어둠도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시인에게 있어 "지상은 싸리꽃이 흐드러진 군락지"이다. 어둠이 내려와야만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도시에서 "뿌옇게 솟아난 화려한 산호섬"은 과연 "몇 마장의 거리"에 있을까. 굳이 싸리꽃의 흐드러진 풍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시는 도시 한편에 소외되어 있는 한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같으면 지천에 널려있는 싸리꽃을 볼 수 있었겠지만 이를 대신하는 도시의 불빛이 있기 때문에 시의 쓸쓸함이 더해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두 편의 시는 자연을 주제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읽는 이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 가령, 박남희의 [중앙선 위의 고양이]는 문명의 속도로 대변되는 자동차를 통해 현대인의 냉혹한 개인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김동수의 [어두워질 때]는 도시의 현란함 속에 소외된 개인의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해석의 접근이 다양하듯 읽히고 보여지는 것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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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실린 이대의의 [길가에 깔려 있는 돌멩이]는 386세대로 일컬어지는 시대의 아픔이 "하잘 것 없이 낮게 깔려있는 다양한 군상들"(돌멩이)로 되살아나 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현대문학} 5월 호에 실린 박은율의 [바다사자여 쉬어 가게]와 최리을의 [테헤란로], 6월 호에 실린 최갑수의 [서른 즈음에]와 김형술의 [독서],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실린 김강태의 [푸른 연골을 위하여]와 이명주의 [곡비], {시와 상상} 상반기에 실린 김순일의 [콩나물 시루를 생각하며]와 최문자의 [쇠 속의 잠] 시편 등은 다시 한 번 읽어보아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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