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 안도현
국화꽃 그늘이 분(盆)마다 쌓여 있는 걸 내심 아까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늘을 쓸어 담다가
저녁 무렵 담 너머 지나가던 노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국화꽃 그늘을 얼마를 주면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붓을 팔 의향이 없냐고 흥정을 붙였다
나는 다만 백년을 쓸어 모아도 채 한 홉을 모을 수 없는 국화꽃 그늘과
쥐의 수염과 흰 토끼털을 섞어 만든 붓의 내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대신 구워서 말려놓은 박쥐 몇 마리와 박쥐의 똥 한 홉,
게으른 개의 귓속에만 숨어 사는 잘 마른 일곱 마리의 파리,
입동 무렵 해뜨기 전에 채취한 뽕잎 일백이십 장, 그리고
술에 담가 놓았다가 볶아 가루로 만든 깽깽이풀뿌리를 내어놓았다
두 노인은 그것들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자신들은 약재상(藥材商)이 아니라 했다
그리고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국화꽃 그늘에 귀를 대보고
쥐수염붓을 오래 만지작거리더니 가을볕처럼 총총 사라졌다
그렇게 옛적 시인들이 나를 슬그머니 찾아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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