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 김기택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도 넘을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새없이 뽑혀져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나온다.
거칠 것 없이 뽑혀져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
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
산과 부딪치면 산이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절벽이 가로막으면 밑으로 가차없이 기다란 구멍이 뚫린다.
뽑혀져나온 길이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 바퀴를 맹렬하게 굴린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바퀴는 맹렬하게 굴러서
바람이 전기톱으로 베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처럼 얇고 넓적하게 잘린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눈을 후벼파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긴다.
올챙이 다리 달리듯 가로수와 전봇대와 건물에 시간이 돋아난다.
풍경은 속도와 반죽되어 윤곽이 지워지며 흐려지고
시간은 엿처럼 찍찍 늘어지며 창밖으로 지나간다.
―― 시집 『껌』
---------------
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꼽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
'♣ 詩그리고詩 > 한국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뚜벅이 반추(反芻) 외4편 /장윤우 (0) | 2013.04.03 |
---|---|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0) | 2012.12.26 |
직소폭포/안도현 (0) | 2012.11.25 |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 안도현 (0) | 2012.11.25 |
인 생/김용택 (0) | 2012.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