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立冬)
소나기 지나가고 물웅덩이가 남아 있네
물웅덩이 속으로 구름이 지나가네
구름 속으로 고추잠자리가 사라지네
말라붙은 흙 속으로 하늘이 사라지네
흙 속으로 사라진 하늘에서 개망초가 올라오네
개망초 위로 소나기와 구름과 고추잠자리가 지나가네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첫눈이 내리네
―이창수(1970~ )
끊임없이 하늘로 말려올라 가던 고장난 텔레비전 화면처럼 이 시는 '지나간다'고 말한다. 생애 처음 몰래 술을 마시고 누웠을 때 빙글빙글 머리 뒤로 넘어가던 천장의 무늬들처럼 이 시는 '지나가고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겨우 '물웅덩이'나 '개망초'만 남거나 올라온다고 말한다. 사라짐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또 다른 사라짐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지나감이 이어지고 이어진다.
이 사물들은 '밖으로' 사라지지 않고 '속으로' 사라진다. 풍경(風景)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生)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머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은 내가 살던 집도 가져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이의 손을, 훗날엔 손자의 손을 '소나기'처럼, '고추잠자리'처럼 가져다준다. 그마저 지나간다. 그리고 첫눈! 모두를 덮는 그 적멸(寂滅)! 나는 두 손을 벌리리라. 그제(7일)가 '입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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