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 상상 • 아름다움
—좋은 시의 몇 가지 유형
강 인 한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서 문학의 위기 내지 시의 위기가 도래하였다고들 합니다. 확실히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 차지하는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은 서점에 가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시집 코너가 예전에 비해서 훨씬 줄어든 게 눈에 보입니다. 물론 시집이 예전보다 더 안 팔리고 일반 독자들이 외면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은 오히려 더욱 활활 불붙는 것 같습니다. 시의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다, 이게 지금 우리 시단의 이상한 현실입니다. 시도 예전보다 훨씬 많이 창작되고 그만큼 많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즈음의 시단과 그 주변을 살펴볼 때 1920년대의 동인지시대와는 또 다른 동인지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편집동인’ 체제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종합 문예 계간지들—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실천문학 등. 뜻이 맞는 동인들의 잡지로 출발한 것들이었습니다. 솔직히 대형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꾸준히 발행되고 있는 유명 무명의 계간지들이 따지고 보면 동호인들이 서로 힘이 돼주고 밀어주어서 명맥을 유지하는 동인지에 다름 아닙니다.
하도 많은 잡지가 발간되고 거기에 시도 그만큼 발표되고 보니 가지각색의 시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에는 세계적 수준의 우수한 작품도 있는가 하면 골방에서 혼자 지껄이는 수준의 독백이나 비밀일기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좋은 시도 있고, 평범한 보통의 시도 있고, 저급한 시도 있습니다. 난해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이해하기 쉬운 시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을 방해하려는 불편한 시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쉬운 정도를 떠나 아예 떡장수 엄마를 잡아먹은 늑대가 문틈으로 내미는 털투성이 앞발처럼 시도 아닌 것을 시라고 내놓는, 가짜 시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가관인 것은 그런 가짜 시에 그럴싸한 상도 주고 등 두드려주는 희한한 정경도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시의 독자는 단순한 독자의 자리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시인이면서 독자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 시 독자는 단순히 시를 피동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시 창작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알게 된 인터넷으로 나는 2002년 3월 '다음(daum)' 사이트에 카페 하나를 개설했습니다. 카페 <푸른 시의 방>, 여기에 나는 하루에 한 편 혹은 이틀에 한 편, 내 눈으로 본 좋은 시를 ‘좋은 시 읽기’라는 코너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용악, 백석, 정지용 등 우리 현대시의 태동기부터 연대순으로 시인 한 사람에 한 편씩 대표시를 올리는 일은 1980년대까지 진행하였고, 그 이후는 잡지나 시집에서 순서 없이 좋은 시를 찾아 올리게 됐습니다. 요즘 그 ‘좋은 시 읽기’는 4350 편을 돌파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두세 편을 한꺼번에 올리기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실은 7천여 편 혹은 그 이상의 ‘좋은 시’를 올린 셈이라 하겠습니다. 시 전문잡지 한 권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다섯 편, 그리고 시집 한 권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다섯 편 정도를 찾아 올리고 있습니다. 기증 받은 시집 한 권에서 한 편도 못 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퍽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꾸리는 ‘좋은 시 읽기’ 코너는 정말 누가 봐도 공정하게 작품을 선별하고 있음에 존재 의의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내 나름대로 오늘의 시 중에서 ‘좋은 시’로 꼽는 건 대체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그건 첫째 감동이 있는 시, 둘째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셋째 아름다움이 있는 시입니다. 시인 또는 평론가에 따라 좋은 시의 분류는 더 자세히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은 시를 나누는 기준을 그렇게 정해 본 것입니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나서도 나는 가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내가 방금 쓴 이 시는 감동이 있는 시인가? 그게 아니면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인가? 그도 아니면 아름다움이 있는 시인가?
감동이 있는 시
시의 내용은 정서입니다. 아기자기한 줄거리를 지닌 서사가 아닙니다.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인생의 깨달음도 아닙니다. 우리 삶의 한 장면에서 우연히 부딪혀 우러나는 정서, 그뿐입니다. 시가 말하는 이야기란 사실 시시한 얘기입니다. 사별한 가족들을 생각하니 서글프다, 아름다운 계절의 풍경을 대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니 섭섭하다, 이런 따위 지극히 사소한 정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비통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심정을 토로할 뿐, 어떤 방식으로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꼬드기지도 않습니다.
나는 정서를 노래하되 그 시의 울림이 큰 시를 ‘감동이 있는 시’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의 장점은 시인과 독자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일 테고, 또한 메시지가 강한 점에서 말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주제가 선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속의 집」전문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이 시는 《현대시학》1996년 2월호에 발표되었습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일가족 네 식구가 겨울 영랑호에 투신한 동반자살. 아마 신문기사에서 시인은 그 슬픈 소식을 접했겠지요. 죽어서도 젊은 내외는 돈을 벌기 위해 새떼들을 좇아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부모를 배웅하며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중섭의 천진스런 그림 같은 그 정경이 떠올려지면서 마침내 시인은 자기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감동’을 보여주는 시를 찾아보자면 백석의 「여승」, 김종삼의 「민간인」등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감동이 있는 시를 지향하는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시적 긴장의 이완으로 말미암은 산문화 경향일 것입니다. 그런 유형의 시들은 행 구분을 무시하고 모두 다 산문처럼 줄줄이 이어 붙여보면 금방 시의 허술함이 드러나기 십상입니다. 자기는 시라고 썼는데 짤막한 수필이거나 철학적인 짧은 산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관광객을 등에 태운 여러 마리 낙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초원과 사막을 오고 간다/ 코에 꿴 줄을 잡은 깡마르고 작은 원주민이/ 앞으로 끌면 앞으로 가고 뒤로 끌면 뒤로 간다/ 줄을 사정없이 반복하며 빠르게 당기면/ 낙타는 코가 찢어질 듯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사람을 내리고 태운다/ 사람보다 덩치가 몇 배나 크고/ 성질이 원래 사납고 냄새가 고약한 짐승이라지만/ 오랫동안 사람에게 길들여진 낙타는/ 덩치 큰 머슴이 주인집 도련님에게 절절매듯/ 사람에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가끔 굵고 긴 목으로 가죽통을 두드리듯/ 울음인지 노래인지 반항인지 소리를 지르다가도/ 다시 사람의 손에 끌려 앉고 서고 걷고 달린다/ 어딘지 모르는 초원에서 죽은 사람을 묻을 때/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 낙타를 죽여 묻어두면/ 어김없이 무덤을 찾아낸다는 슬픈 몸뚱이의 역사/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손에 코가 꿰어/ 평생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니다가/ 사막에 버려지는 무봉(無峰)낙타일지도 모른다
—「낙타의 일생」전문
몽골의 사막에서 보는 풍경. 단순한 관광엽서 이상도 이하도 아닌 풍물시. 요즘 일류 수필가의 작품집을 보면 이만한 정도의 깊이 있는 수필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유안진 시인의 참 좋은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인터넷 상에 행갈이를 한 그럴싸한 시로 둔갑하여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걸 보면 딱할 뿐입니다. 좋은 글이면 됐지, 그게 시면 어떻고 수필이면 어떠냐고 손사래 친다면야 할 말 없겠습니다만.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문학은 언어로 표현된 허구의 예술입니다. 시도 그 속의 작은 갈래이므로 허구의 예술인 것이지요. 그 허구를 위하여 특히 오늘의 현대시는 조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위하여 참신한 비유를 통한 ‘낯설게 하기’ 수법을 사용합니다. ‘낯설게 하기’란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방법.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학적 수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예로, 지하철과 관련된 시를 찾아보니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최영미의 「지하철에서 1」도 있고 에즈라 파운드의 유명한 「지하철 정거장에서」도 있습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흔한 풍경이건만 얼마나 산뜻한 감각의 이미지들인지 모릅니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당선된 시 한 편을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남지은,「넝쿨장미」전문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해설은 당선작을 뽑은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평론가 신형철의 글(《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 심사평)로 편의상 대신하겠습니다.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넝쿨장미」의 도입부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제 몸 안에서 밖으로 가시(“뾰족한 악몽”)를 “밀어내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겠지만, 어느 날 새벽에 악몽에서 깨어난 화자가 그 악몽의 잔영과 힘겹게 싸우는 모습 또한 떠올리게 한다. 다시 잠이 들면 악몽이 이어질 것 같은데, 이대로 눈뜬 채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외로운 일이다. 그렇게 그의 안에는 너무 많은 악몽이 있기 때문에 그는 “나는 내가 너무 비좁다”라고 느낀다. 비좁기 때문에, 그 너무 많은 악몽들은 가시가 되어 밖으로 돋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좁다는 느낌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그 답답함이, 자다 깬 새벽에 창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창을 열면 무엇이 보이는가. 다시 말해, ‘창 안의 나’와 ‘창밖의 세상’ 중에서 어느 쪽의 힘이 더 강한가. 전자의 힘이 강하면 창을 열어도 결국 ‘나 자신’이 보일 것이다. 표현 욕구가 재현 욕구를 이겼다는 뜻이다. 그의 불우한 내면이 세상을 다 빨아들인다. 그러니 눈은 “내 안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역시나 내면의 대체물일 “붉은 새”는 불길하게도 날지 못하고 걷는다. 행여 떼로 날아오르면 하늘이 검게 찢어진다. 이 ‘붉음’과 ‘검음’은 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는 장미의 ‘검붉음’을 나눠 반영하면서 후반부의 분위기를 이끈다. 이어 이 시는 그의 악몽이 가족의 현재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가족이라는 숨은 상처가 화자의 내면을 점령하는 순간, ‘내리는 눈’도 ‘쏟아져내리는 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가족의 문제는 ‘취한 아버지’와 관련돼 있는 것 같다. 그 아버지는 가족들을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발톱을 뽑는 모습이 그렇게 읽게 한다. 가시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넝쿨장미는, 이렇게, 서로 찌르거나 찔리면서도 서로를 떠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으로 유려하게 전환된다. 그리고 이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마지막 두 줄은 ‘나’의 가시가 ‘나’를 찌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는 자의 체념적 절망감을 읽어내야 할지, 아니면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가족의 구성원이기도 한 ‘나’ 자신의 자기 극복이 필요하다는 결단의 몸짓을 읽어내야 할지 쉽게 선택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건 이 결말이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모호함의 공간은 여전히 넓다.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는 오늘의 현대시 중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편의 좋은 예를 더 들어보면 함기석의 「뽈랑공원」, 윤성택의 「후회의 방식」, 조인호의 「철가면」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후회의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역전시킨 독특한 시상의 전개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앞서 나온 ‘매력적인 모호함’이라는 것. 이 모호성(ambiguity)이라는 시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젊은 시인들이 곧잘 빠지는 함정에 특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젊은 시인들이 좋아하는 소위 전위적인 시, 아방가르드의 유령에 홀려서는 안 됩니다. 미의식을 포함하지 않은 모호성, 비논리 자체만을 즐기는 어불성설, 중언부언, 요령부득의 모호성 등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혈관을 찾던 약한 팔뚝 빛 딸기를 고른다
색연필을 핥고 나서부터 무심(無心)이 도졌던 중학(中學)의 미술은
오직 기쁘게 얼굴들을 흠집 냈다. 무도병(舞蹈病)이 되어
한 겹씩 얇게 소동들은 떠오를 것이다
나를 낳고 싫증이 났던 엄마의 무렵, 날짜변경선을 지나며
싸고 있는 애벌레를 상대했다, 조용히 들여다본 엄마의 까만 것을
—「가내 판정」부분, 《현대시학》2012년 8월호
날개 안쪽, 퍼덕이던 뼈를 만져본다
허공의 통증이다.
창밖, 꽃들의 방위가 쓸쓸해 길은 길로 걸어와 침묵한다. 안다는 것
과 알고 있다는 주저가 어느 순간 난간이 되고 위악적인 꽃말들이 난
간을 걷는다. 꽃을 물어 나르는 새들의 위장을 탐했던 바람, 귀먹은 바
람을 불러들여 헛구역질을 연습하면 풀냄새가 입안 가득 돌고 손이 검
은 얼룩에 기척이라는 장기가 생긴다.
—「통증의 연대기」부분, 《현대시》2012년 2월호
우선 「가내 판정」은 제목부터 알 수 없는 묘한 말입니다. 잘 참고 읽어봐도 이게 무슨 말인가,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무심(無心)이 도졌던 중학(中學)의 미술”은 얼굴들에 흠집을 내고…. "엄마의 무렵, 조용히 들여다본 엄마의 까만 것" -아마 시인 자신도 이런 구절들을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모르고 나도 모를 소리라고나 할까, 이런 것을 시라고 내밀기엔 낯가죽이 한참 두꺼워야 할 것입니다. 이건 어렵게 쓴 시나 잘못 쓴 시도 아니고 아예 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가짜 시’입니다. 「통증의 연대기」도 역시 독자를 현혹시키려는 말장난으로 된 시입니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게 있을 것 같은 착각만 유발할 뿐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들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시인 혼자 중얼거리는 ‘자폐시’ 혹은 ‘가짜 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시 쓰기를 40년 50 년씩 해 온 중견 이상의 시인들이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시가 있을까요? 그런 건 사기입니다. ‘난해시’란 나같이 시력(詩歷)이 많은 시인들, 혹은 소수의 시인들이라도 꼼꼼히 읽어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넝쿨장미」같은 시를 이릅니다. 저것들은 눈속임의 ‘가짜 시’, 잘 해야 ‘자폐시’일 뿐입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시
누가 뭐래도 문학은 예술입니다. 예술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문학입니다. 문학에서도 맨 앞에 내세우는 것은 시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예술임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예술이 추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아름다움이지요. 미(美)를 추구하는 까닭에 시가 지니는 미 역시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를 떠나서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고기잡이를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한가로운 풍류로 즐김을 노래한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는 우아미(優雅美)가 있고, 죽은 누이를 그리며 슬픔을 참고 내세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월명사의 「제망매가」에서 드러나는 것은 숭고미(崇高美)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조용히 피를 흘리겠노라고 말하는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 깃든 비장미(悲壯美),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풍자, 해학으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권혁웅의 시 「도봉근린공원」은 골계미(滑稽美)를 띠고 있습니다.
검고 푸른 달밤, 관능적인 여인의 춤이 그치고 그녀가 헤롯왕에게서 상으로 받기를 바란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나옵니다. 푸른 달빛 아래 빛나는 은쟁반, 그 위에 검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의 머리.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아름다운,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 희곡 「살로메」를 썼다고 합니다. 그건 유미주의 혹은 탐미주의 내지는 예술지상주의라고도 부르는 문예사조입니다. 미적 가치를 가장 높은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적 견지에서 평가하는 태도나 세계관 곧 예술을 위한 예술, 더 나아가 악마주의로까지 길을 열어나가는 것 자체가 순수예술의 존재 그 자체일는지도 모릅니다.
다리를 벌리고 앉은 의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 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강성은, 「아름다운 계단」부분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
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
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
이 내리지
—박정대, 「음악들」전문
연쇄법을 구사한 시「아름다운 계단」에서는 기괴한 가운데 느껴지는 미의식이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나 에드거 앨런 포에게서 풍기는 약간 그로테스크한 미의식입니다. 그리고「음악들」에서는 부드럽고 달콤한 말맛의 음악성을 곁들여 판타지 같은 이미지의 연속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지요. 이와 같은 시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모호한 말도 아닌 혼잣말의 안개 속에 종적을 감추는 비열한 시들보다 차라리 열 배 백 배 낫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좋은 시의 갈래를 감동이 있는 시, 상상의 재미가 있는 시, 아름다움이 있는 시로 나누어 보았는데 이는 내가 혼자 생각해 본 분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학자들의 빛나는 이론에 도움 받은 바도 없이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딴에는 열심히 시를 써오며 내 몸으로 터득한 어설픈 시론에 불과합니다. 한 편의 시가 저런 요소들을 두루 섞어서 나타날 수도 있겠고, 전혀 다른 모습의 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 한 편을 탈고하고 나서 이 세 가지 기준에 맞춰 자기 스스로 점검해 보는 것도 그다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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