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
해마다 봄이면 벚꽃 개화 예상도가 발표된다. 한반도를 지나가는 벚꽃의 날짜별 등고선이다. 여름철 태풍의 진로를 예상한 지도와 닮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찬란한 웃음판들의 이동 속도와 진로를 본다고 해야 할까?
그 지도를 한참 보고 있노라면 꽃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 아득한 남쪽 어디에서부터 비롯하여 밀물져 밀려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그 꽃들의 집단적 걸음걸이는 내가 사는 고장을 지나 내가 사는 산천을 뚜벅뚜벅 걸어서 벗어나간다. 그 꽃들의 등고선이나 따라가며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하다가 문득 깨어난다.
봄은 '한눈도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는' 모습일 수 있다. 봄은 도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란 것, 그보다 더 크게, 피투성이 흙투성이로 온다는 것을 이 시는 지난 엄혹한 시대에 보여주었다.
-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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