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언덕에서 / 나태주

시인 최주식 2014. 1. 21. 23:23

언덕에서 / 나태주

 

1

저녁때 저녁때

저무는 언덕에 혼자 오르면

절간의 뒤란에 켜지는

한 초롱의 조이등불이 온다.

돌다리 내려 끼울은 석등石燈에 스미는

귀 떨어진 그 물소리,

내게 스민다.

숲의 속살을 탐하다 늦어버린

바람의 늦은 귀가歸嫁가 온다.

 

2

아침에 비,

머리칼이 젖고

오후 맑음,

언덕에 올라 앞을 막는 바람 한 줄기,

나무숲에서 새소리 난다.

새소리 끝에 묻어나는 숲의 살내음.

아아, 누구든지 한 사람 만나고 싶다.

누구든지 한 사람 만나고 싶다.

 

3

오늘은 불타는 그대의 눈

그대의 눈썹.

 

엷은 풀냄새 나다,

여린 감꽃냄새 나다,

그대 머리칼,

 

까맣게 잊어먹었던

그대 분홍 손톱에 숨겨진

아직도 하얀 낮달이 한 개.

 

찾아가다 찾아가다

길 잃고 주저앉은 산골 속

햇볕에 불타는 노오란 산수유꽃길

그대의 눈.

 

이제사 잠든

대숲바람 소리

그대의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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