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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 실비아 플러스

시인 최주식 2006. 5. 29. 22:03
아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 대리석처럼 무겁고, 神으로 가득찬 푸대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와 아름다운 노오쎄트 앞바다로 강낭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갑처럼 커다란 잿빛 발가락을 하나 가진 무시무시한 조상. 전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드리곤 했답니다. 아,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의 도시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흔하더군요. 제 폴란드 친구는 그런 도시가 일이십 개는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빠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결코 아빠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혀가 턱에 붙어 버렸거든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전, 전, 전, 전, 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독일 사람은 죄다 아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독일어를 음탕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유태인처럼 칙칙폭폭 실어가는 기관차, 기관차. 유태인처럼 다카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전 유태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전 유태인인지도 모르겠어요. 티롤의 눈, 비엔나의 맑은 맥주는 아주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제 집시系의 선조 할머니와 저의 섬뜩한 운명 그리고 저의 타로 카드 한 벌, 타로 카드 한 벌로 봐서 전 조금은 유태인일 거예요. 전 언제나 아빠를 두려워했어요 아빠의 독일 空軍, 아빠의 딱딱한 말투, 그리고 아빠의 말쑥한 콧수염 또 아리안족의 밝은 하늘색 눈, 기갑부대원, 기갑부대원, 아, 아빠- 神이 아니라, 너무 검은색이어서 어떤 하늘도 비걱거리며 뚫고 들어올 수 없는 十字章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은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아빠, 제가 가진 사진 속에선 黑板 앞에 서 계시는군요.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아니, 내 예쁜 빠알간 심장을 둘로 쪼개버린 새까만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들이 아빠를 묻었을 때 전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땐 죽어서 아빠께 돌아가려고, 돌아가려고, 돌아가 보려고 했어요. 전 뼈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침낭에서 끌어내 떨어지지 않게 아교로 붙여버렸어요. 그리고 나니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어요. 전 아빠를 본받기 시작했어요. 고문대와 나사못을 사랑하고 '나의 투쟁'의 표정을 지닌 검은 곳의 남자를. 그리고 저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 이제 겨우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혀져 목소리가 기어나오질 못하는군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년 동안 빨아마신 흡혈귀. 아니, 사실은 칠년만이지만요. 아빠, 이젠 누우셔도 돼요.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