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책상 앞 달력은 달랑 한 장 남았다. 이맘때면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있다. ‘한 해가 또 저무는데, 해놓은 건 없고….’ 덧없는 세월을 탓하는 사람들 얘기가 아니다. 송년모임이 꼬리를 무는 요즘, 누구나 빠짐없이 한마디 할 것을 요구받는다. ‘평소 땐 발언 기회도 잘 주지 않더니….’ 하지만 해가 넘어가는 때라 다르다. 술 못 먹고 숫기 없는 사람들은 그래서 연말이 괴롭다.
송년모임이 괴로운 숙맥들
어떤 사람은 건배사를 멋지게 해낸다. 며칠 전 공직에 있는 한 친구는 “주향(酒香) 백리, 화향(花香) 천리, 인향(人香) 만리”라며 인연을 중시하자는 말을 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가더니 ‘나라를 위해’라는 구호까지 외쳤다. 다른 친구는 삼행시 구호로 화답했다. ‘변치말자/사랑하는 사람들아/또 만날 때까지’를 선창하니, 참석자들이 ‘변사또’를 세 번 복창해 분위기를 띄웠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톡톡 튀는 건배 구호가 넘친다. ‘개나리’=‘계(개)급장 떼고/나이 잊고/Relax하자’ ‘나가자’=‘나라와/가정과/자신을 위하여’ ‘당나귀’=‘당신과/나의/귀한 만남을 위하여’ ‘당신멋져’=‘당당하고/신나고/멋지게/져주며 살자’ ‘사우나’=‘사랑과/우정을/나누자’ ‘주전자’=‘주인답게/전문성과/자신감 갖고 살자’. 약간 외설적이거나 작위적인 것도 눈에 띈다. 한 음식점 주인의 체험담. “나이 지긋한 단골손님들이 ‘성행위’ ‘성행위’ ‘성행위’라고 외쳐 눈이 동그래졌더니 ‘성공과/행운을/위하여’라고 말하곤 멋쩍게 웃습디다.”
어쨌든 이런 구호를 외워 건배사를 잘하는 사람들이야 연말이 즐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의 처지도 생각해보자. 순서가 다가오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억지로 떼밀려 남 앞에 서면 말까지 더듬는다. 숙맥이다 보니 ‘원 샷’ 소리까지 무섭다. 그래서 행사 때면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피한다. 자연스럽게 발언 순서는 뒤로 밀리기 일쑤다.
그래도 차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보곤, 숨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러나 멋진 말, 좋은 말은 앞에서 이미 다해버렸다. 곧 이름을 부를 텐데 할 말은 머릿속을 빙빙 돌며 떠오르지 않는다. 어렵게 생각해낸 말을 바로 앞 사람이 해버리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럴 때 ‘×××씨’하는 말이 들리면 땅속에라도 꺼져들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송년모임 때 지체 높고 말 잘하는 분들은 말을 좀 아끼자. 말 잘하는 것이 말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건배사는 짧고 함축적인 게 더 좋다. 또 숫기 없는 사람들이 먼저 말하도록 배려하자. 어제부터 광화문 교보빌딩 벽엔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라는 글(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 중)이 걸렸다. 말이 짧은 사람은 송년모임 때 서가에 꽂힌 시집의 먼지를 털고 좋은 시 구절을 찾아내 미리 외워오면 어떨까.
정치권 ‘대타합대’ 외쳐주길
세종시 4대강 문제로 난리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모두에게 절실하다. 몇 년 전부터 건배할 때 여당은 ‘위하여’, 야당은 ‘위하야’를 외친다. 한나라당내 친이(親李), 친박(親朴)은 ‘위하리’, ‘위하박’을 고집한다. 이제 세종시 원안 수정에 반대하는 쪽은 ‘세원고=세종시/원안+Α/고수하라’를, 찬성 쪽은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따와 ‘역부안=역사에/부끄럽지/않게 수정하자’를 외칠지 모른다.
연말 여의도 정가에는 전운(戰雲)이 짙다. 여야가 ‘대화하고/타협해/합리적인/대안을 찾아내야’ 나라가 편안해질 터인데. 여야 의원들이 혹시 만나 술잔을 부딪칠 때 당파성 구호 말고 ‘대타합대’를 함께 외쳐줄 것을 기대해본다. 누가 뭐라 해도 정치와 통치는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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