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나의 ‘고도를 기다리며’

시인 최주식 2009. 12. 6. 20:26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나의 ‘고도를 기다리며’

 

#1952년 47세가 된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써냈다. ‘고도…’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남프랑스 보클뤼즈의 농가에 피신해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인 기다림의 주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53년 1월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된 ‘고도…’는 기껏 한 달 정도 지속될 것이란 예상을 깨고 파리에서만 300회가 넘게 공연됐고,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번역돼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 69년 베케트는 ‘고도…’로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바로 그 해 12월 ‘고도…’의 한국 초연이 있었다. 연출자는 33세의 임영웅이었다. 그 후 40년 동안 임영웅은 27번에 걸쳐 ‘고도…’를 연출했다. 물론 그때마다 달랐다. 그리고 지난 8일부터 28번째 ‘고도…’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대단한 집념과 열정이다. 그 사이 33세의 혈기 넘치는 검은 머리는 73세의 은근한 백발로 변했다. 하지만 그의 무대는 결코 늙지도 안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를 거듭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웠다.

# 하나의 연극을 40년 동안 28번이나 새롭게 무대 위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투혼이다. 거기엔 삶의 의식 같은 연극을 서른 번 가깝게 다시 고쳐 선보인 노 연출가의 열정과 집념, 그리고 기다림과 숙성의 위력이 담겨 있다. 뭐든 단번에 해치우려 하고 당장에 결판내지 못해 안달하는 요즘 세태에 역행하는 임영웅의 ‘고도…’엔 기다림과 숙성의 묘한 맛을 우려 낸 진정한 예술 거장의 숨결이 진하게 배어 있다.

# 연극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늙은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기다림으로 끝난다. 그들에게 삶이란 곧 그 기다림이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고, 그에 따른 초조함과 낭패감을 떨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지껄이고, 장난치며, 논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 본능적인 삶의 방식이다. 기다림은 절망을 이기는 방법이고 희망을 품는 자세다.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내일을 기약한다.

# 극이 끝나도록 기다리던 고도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기다림을 향한 절박함이 텅 빈 무대를 후려치듯 끝나는 것이 연극 ‘고도…’의 묘한 맛이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 기다림이 사랑임을. 배고파 본 사람은 안다. 한 덩어리의 빵을 간절히 기다림이 곧 생명임을. 신의 응답을 구하며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 기다림이 신앙임을. 갇혀 본 사람은 안다. 풀려날 날에 대한 기다림이 자유임을. 결국 기다림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이다. 나아가 무엇을 기다리느냐가 곧 그 사람의 미래다.

# 기다려야 숙성될 수 있고 기다려야 얻을 수 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삶의 놀라운 지혜요, 힘이다. 철없는 자식이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릴 줄 아는 부모만이 철든 자식을 얻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세상을 얻는다. 하지만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는 것조차 기다리지 못해 경적을 울리며 안달하는 우리에게 기다릴 줄 아는 것의 힘과 미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그것을 회복해야 할 때다.

# 기다림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다. 기다림은 막연히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꿈·희망·미래를 품어 부화시키는 또 다른 의미의 적극적인 행위다. 연출가 임영웅이 40년 동안 ‘고도…’라는 하나의 작품을 품고 또 품어 위대한 삶의 작품을 새롭게 부화시켜 냈듯이 이제 우리도 나만의 ‘고도…’를 품어내야 하지 않을까.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버텨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