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멋지게 늙는 법
# 언젠가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우아하게 늙어가는(aging gracefully)’ 미국인 10명을 선정한 바 있다. 남성으로는 1937년생인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그와 동갑내기인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 그리고 1930년생인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등이 선정됐다. 여성으로는 1941년생인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역시 동갑내기 인권운동가이자 반전평화운동가인 가수 존 바에즈, 1931년생인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 그리고 1930년생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남편 간호를 위해 대법관 자리를 버린 샌드라 데이 오코너 등이 포함됐다.
# 만약 우리나라에서 멋지게 늙어가는 사람 10명을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일단 정치인 중에서는 전무할 것 같다. 경제인 가운데서도 선뜻 꼽기가 쉽지 않다. 워런 버핏 같은 이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화 혹은 예술인 가운데서는 분야별로 몇 사람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의 박정자와 손숙, 음악의 이강숙과 신수정, 그리고 국악의 황병기와 안숙선 등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 멋지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에 손사래를 칠지 모른다.
# 그런데 여기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진짜 멋지게 늙어간 사람이 있다. 김득황 옹(翁)이다. 그는 58세였던 1973년 4월부터 94세가 된 지난 3월까지, 만 36년 동안 ‘입양아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1915년 평북 의주 생인 김 옹은 공무원 월급으로 5남1녀를 키우면서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과 폭격 등으로 부모를 잃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전쟁 고아 세 명을 자식으로 들였다. 그리고 1967년 내무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한 김 옹은 어린이 구호단체인 한국십자군연맹 등에서 일하며 고아원 지원사업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1973년 동방사회복지회를 창설해 6만여 명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새 부모를 만나게 해줬다. 그는 36년의 세월 동안 입양되어 떠나가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끌어안고 올망졸망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이런 기도를 올리곤 했다. “어린 것을 상처 입혀 또 이렇게 떠나보내오니, 꼭 이 생명을 지켜주시옵소서.”
# 김득황 옹의 삶은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빼닮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결국 김 옹의 기도를 받고 4만5000여 명은 해외로, 1만5000여 명은 국내로 입양됐다. 김 옹은 사랑의 봄길을 열며 가장 아름답게 또 가장 멋지게 늙어간 사람이리라.
# 로저 로젠블라트는 『나이 듦의 법칙(Rules for Aging)』이란 책에서 나이 들수록 이렇게 하라고 권한다. “나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대단해’란 찬사를 조심하라.” “외로움보다는 차라리 싸움이 낫다.” “한꺼번에 인생의 8분의 1 이상을 바꾸지 말라.”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라, 그리고 도움을 주라.” 『계로록(戒老錄)』을 쓴 소노 아야코 역시 이렇게 당부한다. “늘 인생의 심리적 결재를 해두라.” “푸념하지 마라.” “젊음을 시기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더 멋지게 꾸릴 생각을 하라.” “남이 ‘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 “지나간 이야기는 정도껏 하라.”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기르라.”
# 누구나 늙는다. 그것은 결코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담담한 늙음은 때로 젊음보다 멋지다. 젊음이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뭔가가 늙음 안에는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다. 그러니 이 푸르디푸른 젊은 오월이 다 가기 전에 스스로의 늙음에 대해 정녕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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