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산책] “인생은 초침이고, 생명은 코숨이다”
인생은 거창하지 않다. 인생은 초침(秒針)이다. 시계판을 맴도는 초침의 1초 1초가 쌓여 하루가 되고, 1년이 되고, 인간의 일생이 된다는 의미에서다. 인생초침은 언젠가 멈추기 마련이다. 자신의 인생초침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멈춤의 시각을 향해 모든 인간의 인생초침은 지금도 1초 1초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초침이 멎으면, 사람들은 그 멈춤을 죽음이라 부른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인생초침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요, 오늘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의 시간이 없는 까닭이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죽음은 인간의 코끝에 붙어 있다. 지금 코로 내뿜은 숨을 다시 들이켜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인생의 초침이 멎으면, 인간은 더 이상 코로 숨을 들이켜지 못한다. 우리말로 생명을 ‘목숨’이라 하고, ‘목숨’을 거두면 죽음이라 한다. 생명이 숨길인 목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표현은 다르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것없느니.’(이사야2;22/공동번역) 하나님은 인간의 숨이 목이 아닌 코에 붙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코로 정상적인 호흡을 하는 사람에게는 코가 숨의 첫 번째 입구인 동시에 마지막 출구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은 목숨이 아니라 코숨이다. 인간의 생명도, 죽음도 모두 코끝에 붙어 있다. 모든 인간은 코끝에 죽음을 매달고 다니는 존재다. 죽음은 외딴 공동묘지에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공동묘지는 죽음의 종착역일 뿐 죽음의 시발점은 인간의 코끝이다.
그림=박용석 기자 | |
또 다시 새해가 시작되었다. 어제와 똑같은 날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새해, 새날이라고 들뜬다. 새해는 달력의 교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존재의 내적 변화로만 가능하다. 내적 변화는 인생은 초침이요, 생명은 코숨이고, 사는 것은 매일 자기생명을 갉아먹으며 죽어가는 것임을 깨닫는 사고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그 사람만 초침과 코숨, 자기생명을 갉아먹는 죽음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달력을 바꾸어도 묵은해의 연장일 뿐이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권한다. 이 말은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든가, 정해진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일을 끝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말 ‘아끼라’고 번역된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건져 올리다’는 의미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는 24시간이다. 어떤 사람은 그 1초 1초를 무의미하게 흩날려 버리고, 어떤 사람은 진리로 건져 올린다. 영원한 진리로 건져 올린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간은 이미 영원에 접속된 까닭이다. 시간을 진리로 건져 올리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초침이 멎는 순간, 인생 짧음과 덧없음을 한탄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숨으로 호흡하는 사람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스쳐가는 1초1초를 영원으로 건져 올리는 사람이다. 그는 곧 예수님의 숨으로 호흡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은 그분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숨으로 호흡한다는 것은 진리로 숨 쉬는 것이다. 자신의 코숨을 진리에 의한 들숨과 진리를 위한 날숨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1초 1초를 건져 올리는 사람이다. 그의 코끝에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이 맞닿아 있다.
예수님은 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 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에 집착하는 것은 죽기 위해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기에, 결국 그는 자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잃을 수밖에 없다. 자기 생명을 갉아먹되,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뛰어넘어 진리를 위해 생명을 갉아먹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이처럼 영원한 진리로 자신을 스쳐가는 1초 1초를 건져 올리고, 영원한 진리에 의한 들숨과 날숨의 코숨을 쉬고, 영원한 진리를 위해 날마다 죽는 사람의 삶이 어찌 새날 새해로 승화되지 않겠는가?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보인다는 것은 이미 소멸 중에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가치에만 현혹되어서는 제아무리 달력을 바꾸어도 새해 새날이 될 수는 없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은 뒤에 정말 영생이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다. "너는 죽기 전 지금, 네게 정말 생명이 있느냐?” 제자는 죽은 뒤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알았지만, 스승은 지금 참생명을 지닌 사람이 죽어서도 영생을 누린다고 답한 것이다. 제자는 자신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스승은 너는 지금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제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느라 매일 죽는 자였고, 스승은 보이지 않는 영원을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 도리어 사는 사람이었다. 보이는 것만을 위해 올해도 묵은해의 연장으로 만들 것인가, 보이지 않는 영원을 지향하는 새해를 누릴 것인가, 그 선택은 각자의 자유다. 그 선택이 각자의 자유인 만큼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전적으로 그 자신의 몫이다.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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