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소리 / 이생진
오후 네 시 반
나는 동도 대밭 길 언덕에 서 있고
배는 여수를 향해 가는구나
사실이지 배는 가고 싶은데도 없는데 억지로 가는구나
여기서는 여수 밖에 갈 곳이 없다
거문도에 오면 죽어라 하고 가는 곳이 여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염소처럼 풀을 뜯어야 외롭지 않다
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차마 할 일이 아니다
동백꽃처럼 혼자 남는다는 건
참 할 일이 아니다
한 동네가 다 떠나는데
소나무 한 그루 마을 언덕빼기에 남는다는 거처럼
혹은 무덤처럼
자식들은 다 뭍으로 떠났는데
무덤만 풀숲에 남아 있다는 거
이런 외로움을 지키는 것은
배에 실을 수 없는 산천초목이나 무덤도 마찬가지다
시인도 사람 없는 데서는 큰 소리를 하지만
그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
너도 산천초목이 되어보렴
그게 쉬운 일인가 초목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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