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관음 스카프 |
관음 스카프
이미산
관음 스카프를 목에 두를 때만큼은 놓아주자. 일년 중에 칠박 팔일, 가을의 일주일간은 관음의 계절이니…. 오늘 목에 두른 스카프를 매만지면서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다고, 그러니 푸른 하늘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말하리라.
사십구재를 올릴 사찰에 가기 전에 나는 그 스카프를 찾는다. 둔황에서 사온, 말하자면 기념품 중 하나였던 스카프는 장롱 걸이에 다른 스카프들과 뒤섞인 채 매달려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 입고 목에 관음 스카프를 두르기로 한다. 어영부영 멍하게 지내는 사이, 가을은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서둘러 목에 감을 것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누워있던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나는 더할 수 없이 늘어졌고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바람 든 무처럼 뚫린 가슴에 어쩌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청보라와 옅은 핑크 그리고 비취색이 섞인 스카프의 한가운데에는 관음보살이 놓여 있었다. 둔황의 막고굴을 돌고 박물관이라는데 갔을 때 나는 관음보살이 그려진 모사 그림 한 점을 사려고 했다. 기념품이래도 좋았고 숙제라 해도 좋았다. 숙제라 함은 어두운 석굴을 더듬어 들어가 보았던 관음보살이 미소로 내게 무언가를 일러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해야겠다. 지금 그 미소에 대해 짧게는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관음이 그려진 그림을 사려고 했으나 다른 건 다 있는데, 하필 관음만 다 팔리고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관음보살이 그려진 그 스카프를 골랐던 것이다. 숙제라고 해놓고선 그것을 장롱 속에 넣어두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올 여름 둔황에 간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여행사의 홍보용 이메일을 열어보고는 무턱대고 여행사로 전화를 걸었다. 일년 전 여름 K와 같이 앙코르와트에 다녀올 때 잠시 이용한 여행사일 뿐인데 담당자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남아 쪽을 전문으로 맡고 있는 듯한 여자는 내가 기억난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거기다 이번에도 남편분과 같이 가실 예정이냐고 물어서 나를 뜨악하게 했다. 우리를 부부라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대답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그가 같이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하자 여자는 얼른 화제를 돌려 여행상품을 소개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고객이 취소한 실크로드 답사가 있는데 그래서 평소보다 아주 저렴한 돈을 내고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마침 그 일정이 내 휴가기간과 겹치기도 해서 나는 선뜻 그 팀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칠박팔일의 일정으로 실크로드의 초입을 돌고 오는 여정이었다. 그럴싸한 휴가지는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이기도 했지만 어딘가로 멀리 다녀오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나는 지쳐 있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는 말을 몇 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아버지의 목에선 쉭쉭 소리가 새나왔다.
갈수록 아버지의 몸이 고사목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끼면서 나는 차라리 가시는 게
서로 편하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더랬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호스피스 병원에 있는 아버지에게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비는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니 따로 정산할 것은 없었지만 고모를 만나 휴가를 간다는 말도 전하고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시라며 용돈도 좀 드리고 와야겠다는 들어서였다. 나는 겨우 한달에 두어 번 들렀다 가지만 고모는 틈틈이 짬이 나는 대로 들러 아버지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얼굴을 보러 가곤 했지만 막상 주말이 다가오면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주말엔 K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 혼자 보내야 했으므로 잠시 다녀오곤 했지만 아버지를 보고 오면 마음이 뒤엉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가도 별로 말이 없었다. 하긴, 열한 살 이후로 이십 년이 넘도록 서로 함께한 시간이 없으니 할 말도 없을 법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멀거니 바라보곤 몇 마디 웅얼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고는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그동안의 세월에 대해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을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내심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비록 육체는 병들었어도 마음만은 여전히 심플하다는 생각에 적잖이 안심하기도 했다.
마무리해야 할 계약 때문에 떠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짬을 낼 수 있었다. 나와 팀원들이 공을 들이고 있던 아파트 재건축의 디자인 시안이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고 자연친화적이면서도 거주자들의 생활패턴을 고려한 색을 고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시공업체들은 단가를 내세우며 클레임을 걸기 일쑤였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색을 디자인하는 것보다 지난한 작업이었다. 클라이언트를 만나 색채를 설득한다는 것은 감각을 넘어선 정서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K를 만난 것도 그런 과정에서였다. 그는 내 설명을 잠시 듣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회사를 설득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그런 그가 고마워 계약이 성사된 후 그에게 술을 샀고 또 그것이 오 년 전에 우리 관계가 시작된 계기이기도 했다.
보름 만에 보는 아버지는 부쩍 말라서 살가죽은 들러붙고 뼈만 앙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폐암 말기 환자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낯빛이며 피부도 거무죽죽해져 갔다. 얼마 전부터는 말을 몇 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아버지의 목에선 쉭쉭 소리가 새나왔다. 갈수록 아버지의 몸이 고사목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끼면서 나는 차라리 가시는 게 서로 편하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더랬다. 차마 입 밖에 내서 말하진 않았지만 고모가 그냥 내일이라도 가시지, 뭐 씨나락이라도 붙잡을 게 있다고, 하면서 내 눈치를 볼 때도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더 이상 너한테 못할 짓이지. 고모는 비싼 병원비도 걱정인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직장생활 칠년 동안 모은 돈도 내 인내심과 함께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삼년 넘는 시간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버텼다. 그 삼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주말에 아버지 얼굴을 잠깐 보고 오는 일과 때마다 병원비를 지급하는 일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나는 지겨워했다. 호스피스 병동 앞뜰에 때 아닌 코스모스가 뙤약볕 아래 고개를 꺾고 있었다. 고모, 저 휴가 갔다 올 거예요, 일주일쯤. 휴대폰 가져가지만 혹시 연락이 잘 안될지도 몰라요. 고모가 어디 멀리 가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냥 바람 쐬러 간다고만 말했다. 제가 자주 전화할 게요. 고모는 아버지가 언제 어찌 될지 모르는데 멀리 여행간다는 내가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나를 고모 집에 맡겨두고는 말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내가 열 한 살 되던 해였다. 그 후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잊을만하면 고모에게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다. 대전 어딘가에서 새살림을 났다고도 했고, 강원도 한 사찰에서 탱화 작업을 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병들기 전에 들은 건 경기도 어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막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길 틈도 없이 시간에 쫓기다가 인천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나서야 겨우 K에게도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둔황에서 내가 처음 본 것은 평생 막일에 시달린 듯한 늙은 낙타였다. 명사산을 오르던 날 아침엔 비가 올 듯 말 듯 구름이 잔뜩 끼어 희끄무레했다. 이곳의 가이드로 나온 풍채가 넉넉한 초로의 신사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름 대신 친숙하게 현장법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현장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좋아 아예 정착해버렸다고 했다.
명사산(鳴沙山·밍사산)은 강풍에 무너져내리는 모래가 우는 듯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모래산은 칼날 같은 등성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로부터 모래가 쉼없이 흘러내리는데 등성이들이 어떻게 밋밋해지지 않고 그다지도 날카롭게 솟구쳐 뻗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바람이 불자 모래산 꼭대기에서부터 모래가 자욱한 안개처럼 흘러내려 산은 신비한 기운에 휩싸인 듯했다.
여남은 마리의 낙타가 일렬로 무릎을 꺾고 앉아, 눈곱이 잔뜩 낀 눈을 내리깔고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낙타는 겁이 많고 예민한 동물이라고 했다. 낙타들은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어서 안장 옆구리에 고유번호를 달고 있고, 어디서건 배를 채우고 나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녀석들의 얼굴엔 도무지 표정이란 게 없었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하더라도 감정이 있어 희로애락이 표정에 드러나는 법이다. 혹시 그들은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짐승인 것인가. 내가 탄 낙타는 늙은 낙타였다. 깡마르고 거친 털마저도 숭숭 빠져버린 몸엔 기름기가 하나도 없는데다가, 옆얼굴엔 칼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는 볼품없는 녀석이었다. 낙타의 몸피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거친 살갗 안으로 흐린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낙타를 보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떠올려야 했다.
불룩 솟은 낙타 등에 올라 몸을 끄덕거리며 사구(砂丘)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낙타가 무딘 발굽으로 모래를 푹푹 밟으면 모래는 허물어져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산등성이엔 바람이 강했다. 헐거운 끈으로 묶은 모자가 휙휙 벗겨져 모자를 쥔 손으로 고삐를 틀어쥐었다. 거대한 봉분처럼 솟아 있는 모래산들이 아득하게만 보였다. 멀리 다른 능선을 타는 사람들은 아랑곳없다는 듯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었다. 벌써 힘이 드는지 내 늙은 낙타는 콧김을 쉭쉭 불었다.
장경동과 거대한 대불과 와불, 새 깃털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신라인으로 보이는 인물과 수하미인도가 그려진 벽화들.
아버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듯…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더운 지역 풍습대로 낮잠을 자기로 했다. 가이드인 현장은 예정된 막고굴 관람시각까지 여유가 있으니 푹 쉬라고 했다. 객실은 냉방시설이 잘 돼 서늘했다. 침대에 누워 나는 늙은 낙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낙타는 가시풀을 뜯으며 피를 흘린다고 했던가. 낙타, 이 가엾은 짐승은 오랜 시간 내게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난 니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한번도 소리내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얼마 전에 고모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아버지는 얼마간의 돈과 함께 물감상자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버지답게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언제 다시 오마는 말도, 기다리라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물감 상자에는 낙타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 물감이 아까워 미술시간에도 가져가지 않고 혼자 있을 때면 책상서랍에서 꺼내 들고는 가만히 낙타를 들여다보곤 했다. 상자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낙타는 쓸쓸해 보였고, 피곤해 보였고, 때론 어디론가 떠나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두들 오수에 빠졌는지 거리는 한산했고, 고요 속에 햇빛만이 작열하고 있었다. 고모는 아버지를 가엾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가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조부모 이야기며 엄마와 아버지의 연애 시절이며 고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뜻대로 살기 어려웠어. 네 할아버지가 보통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어. 네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미대에 가려고 했지만 장손을 환쟁이로 키울 수 없다며 반대해서 결국 붓을 꺾어버렸지. 그것 말고도 번번이 반대에 부딪혀 오라버니가 지는 일이 많았어. 져도 오라버니가 또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 해서 집안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의 기 싸움에 늘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지. 딱 한번 네 아버지가 이긴 적이 있는데, 그건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 엄마와 결혼해버린 거였어. 너무 심하게 반대하자 니 엄마를 데리고 야반도주해버렸지. 호호호. 지금 생각해도 통쾌해. 니 엄마랑 내가 친구잖아. 내가 니 엄마 부추기기도 했지만 진짜 야반도주할지는 몰랐거든. 집안은 발칵 뒤집혔지만 나는 속으로 브라보를 외쳤어. 난들 무슨 철이 있었겠니. 두 사람이 그렇게 고생할 줄도 모르고.
고모에게 전화를 넣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쪽 통신 사정이 열악해 호텔 로비에 가서 걸어야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와 있는 걸 알면 고모가 더 서운해 할 것도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멀리 날아와 서역까지 와서도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안타깝기도 했다.
둔황에서 돌아온 다음 날 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의사는 내게 아버지가 며칠 버티실지 모르겠다고 일러주면서 멀리 여행갔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하고 걱정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 의사는 내가 없는 사이 환자가 사망하게 될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으나 나는 왠지 나를 책망하는 소리로 들려 볼멘소리로 곧 가겠다고 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굳이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아버지의 얼굴은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말을 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나를 힘겹게 올려다보는 그는 눈으로 어디 멀리 다녀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눈빛엔 서운함이기보다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버지의 눈빛은 당신도 어디 먼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둔황의 막고굴을 다녀왔다고 말하자 아버지의 눈빛이 일순 물기가 돌면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달리 할 말도 없고 아버지가 듣고 싶어 한다는 생각도 들어 나는 아버지의 귓가에 내가 걸어다닌 둔황의 석굴 속 이야기를 자박자박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언젠가 화집 속에서 본 벽화들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즘은 비행기 타면 그리로 바로 날아가요. 명사산이라구 아세요. 모래가 우는 산. 그 산 동쪽 기슭에 오백 개에 가까운 석굴이 운집해 있는데, 바위를 뚫어 벌집처럼 생긴 석굴 안에서 구도자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대요. 그 석굴 안에 불상이나 벽화가 많다는 거 들어보셨죠. 아버지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고굴(莫高窟)은 열 개의 왕조와 천 년의 세월에 걸쳐 갖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진 석굴의 무리를 가리켰다. 나와 일행들은 가이드인 현장을 따라 석굴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쇠사슬에 친친 감긴 자물쇠를 풀고 굴의 철문을 열어젖히자 깊은 향내가 밀려나오는 듯했다. 혜초가 쓴『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서들이 발견되었다는 장경동과 거대한 대불과 와불, 새깃털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신라인으로 보이는 인물과 수하미인도가 그려진 벽화들. 아버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듯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127굴의 항마촉지인에 대해 말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기도 했다. 어두침침한 굴에 안내인이 플래시를 비추면 현장은 색이 바라 흐릿한 그림들 가리키며 세심하게 일러주었다. 부처님이 극단적인 고행 끝에 성불의 마지막 단계를 밟을 때 마라(魔)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창과 활로 무장한 군대로 공격해도, 마라의 아름다운 딸들로 유혹해도 싯다르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조용히 그의 오른손가락을 뻗어 땅에다 대면서 대지에게 자신을 위해 증언해 달라고 한다. 그러자 대지가 사방으로 진동하다가 대지의 여신이 나타나 수많은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마라를 꾸짖어 사라지게 한다. 이어 새벽별이 뜰 때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었다. 여기에서 석굴암 본전불의 모습이기도 한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이 나온 것이었다.
45굴 관음보살은 지구가 자전할 때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년 전의 옛사람들도 별의 움직임으로 우리가 딛고 선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조금 기울어진 채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서늘한 45굴에서 들릴 듯 말 듯 지잉, 거대한 구(球)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나의 환청이었을 것이다. 굴을 되짚어 나오면서 나의 뇌리에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월북한 무용가의 보살춤이 퍼뜩 겹쳐졌다. 무용수는 가만히 멈춰 선 상태에서 천천히 팔을 어깨 높이에서 펼쳐 팔꿈치를 세웠다. 그리고 아주 준엄하게 팔과 손가락을 움직였고, 그 준엄한 움직임만으로 언어를 넘어선 그 무엇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더 이상 말할 재간이 없다. 다만, 그때 나는 인간의 몸이 저렇게 고요할 수도 있다는 것만 막연하게 느꼈었다. 몸은 정지해 있으되 몸 안에서 흘러나온 혼이 날아오를 듯했다. 고요한 움직임. 삼엄함 움직임. 마치 우주의 행성들이 움직이듯이…. 관음보살의 미소 또한 내게 그렇듯 고요한 움직임에 대한 전율과 함께 사람의 삶 또한 저토록 준엄한 것이라고 깨닫게 하고 있었다.
45굴을 보고 나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조금 어지럽기도 해서 석굴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녁이면 밤 기차를 타고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다음날 아침에 우루무치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밤에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도안과 클라이언트와 씨름하고 가질 수 없는 남자 때문에 부대끼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어 괴로워해야 할 것이었다. 석굴 앞 백양나무 숲에서 매미들이 귀가 따갑도록 울어댔다. 목숨 가진 미물이 혼신의 힘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미궁 속을 헤매다가 지쳐갈 무렵 또 하나의 석굴에서 나는 ‘드디어’ 비천을 만났다. ‘기어이’ 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떤 형용어구를 붙이든 나는 이십 여 년을 돌고 돌아 만난 비천의 하늘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감득할 만한 나이가 못되었다. 고모가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말했지만 그곳이 어디를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마저 내게 낙타 물감을 쥐어주고는 어딘가로 떠나버리자 나는 가슴속 모래집에서 모래가 새나가는 것 간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 해서 내게 죽음이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기이한 공백으로 다가왔고,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한시도 고모 주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내가 열한 살이던 그해 가을, 고모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고 오던 길이었다. 어려서 손도 작았으므로 네모난 두부가 망가지지 않을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난다. 더불어 신문지에 젖은 두부의 차가운 감촉도. 해가 지기 전, 늦은 오후와 초저녁의 갈림길, 그 언저리였을 것이다. 평소라면 동네 아이들이 여전히 놀고 있는 있을 시각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춥지도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나는 왠지 이상한 기운에 감싸여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죽은 엄마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십 여 년 전의 그 푸른빛을 설명하는데 나는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다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학교에서 배운 고려청자를 떠올렸다는 고백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으나 지금도 너무도 선명한 빛깔로 떠오른다. 그 하늘은 이십 여 년이 지나 내가 둔황의 어두침침한 굴 안에서 확인하게 되는 그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울고 싶어졌다. 두려웠다. 엄마가 계신 천상의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준다는 외경감에 찬 두부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려청자의 비색. 비천의 색. 비천의 하늘. 어쩌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하늘이 아닐지도 몰랐다. 천 년 전의 한 도공이 사막의 어디쯤엔가 와서 본 하늘을 천년 후에 내가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어떤 깨달음처럼 서늘하게 와 닿아 어두운 굴 안에 선 채 나는 가만히 진저리를 쳤다. 실제로 나는 그날의 그 하늘, 천상의 아름다움이 잠시 현현한 비취빛 하늘을 문득 그리워하였으나 결코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제 진정한 영면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는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듯도 보였다.
비단으로 얼굴을 덮는 순간 아버지의 조용한 미소가
둔황의 관음을 닮아 있다는 것을 퍼뜩 알아챘다.
비천에 대해 말할 때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회한, 아니면 어린 나를 버려뒀다는 죄책감. 오랫동안 아버지를 마주하고 말을 하고 있다 보니 이 장면을 위해서 내가 멀리 서천서역을 돌고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일에는 이처럼 우연이란 없는 것일까.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아버지와 나 사이가 필연이듯이. 아무래도 죽음이 다가오는 육친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다 싶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벽화에는 돈 많고 권세 있는 귀족이나 실력자들의 공양이나 시주로 그려졌다는 기록은 있어도, 누가 그렸다고 밝힌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일부 이름난 화가들 몇몇이 이 엄청난 그림들을 다 그릴 수가 없었을 테니 분명 수많은 화공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막고굴 북쪽 끝에는 벌집처럼 뚫린 동굴군이 있는데, 물감 그릇과 안료 등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화공들의 주거주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어리처럼 비좁은 방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새우잠을 자면서 위대한 사막의 대화랑을 일궈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면서 벽에 그림을 새겨 넣은 것일까. 묶인 몸이기 때문인가. 그럴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날마다 붓을 든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슴에 비어있는 공백과 적막이 있기에 단단한 돌을 깎고 바위에 현란한 색채를 입혔으리라. 나 또한 엄마가 죽고 없다는 공백과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굶주림이 있었기에 그날의 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듯이. 가슴이 비어 있어서 느끼는 아름다움, 헐벗은 굶주린 마음이 빨아들이는 하늘빛. 어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그 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움의 색을 찾으려 했으나 결코 찾지 못했으므로 미술을 전공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는 여태 색채를 고르는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막고굴 속 화공을 생각하는 사이, 아버지는 그새 성난 얼굴로 병실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헐벗은 화공의 눈빛을 보았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그저 석굴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들려준 비천의 하늘을 날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에게 둔황은 설화 속의 먼 서천서역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그의 마른 입술에 감로수라도 떨어뜨려야 했던 것일까.
다음 날 나는 관음도 비천도 아버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린 업무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아파트 재건축 시공에 채택한 도안들이 클레임에 걸려 있었다. 문제는 단가가 높아 우리의 디자인을 채택할 수 없다는 거였다. 며칠 내로 계약을 마무리지어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느라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모래사막에 있을 때보다도 더 목이 칼칼했다. 내가 전화기를 붙잡고 목청을 높이고 있던 그 시각, 아버지는 기어이 목숨줄을 놓고 떠나갔다. 내가 휴대전화를 받지 않자 고모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의 임종을 알려주었다. 고모의 전화를 끊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말은 아마도 ‘ 이제 그만 쉴란다’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기도 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빳빳한 삼베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게는 여름의 끝뿐 아니라 무언가의 끝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왜 하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석굴이니, 관음이니, 비천을 얘기했을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유년의 추억도 있을 테고 엄마 얘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좀 편안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녁 무렵 대전에서 올라오신 작은아버지와 영안실에서 망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무스레했던 아버지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창백해 보였다. 영안실의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도 몰랐다. 작은 아버지는 망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작은아버지 옆에 멀거니 서서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누워 있었다. 나는 지잉, 하고 거대한 구가 움직이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게 몸을 전해준 이 사람도 이제 거대한 구가 움직이는 순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의 차가워진 얼굴을 응시하면서 지잉, 지잉 울리는 냉엄한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영안실의 기계에서 나는 소리일지도 몰랐지만 그러나 내게는 관음의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고, 조문객은 띄엄띄엄 찾아왔다. 고모들이 알아서 밥과 국과 고기를 주문했고 고모부들은 조문객을 맞았다. 나는 사실 할 일이 없었다. 구석에 앉았다가 조문객이 오면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슬프다는 감정은 일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장례식 절차는 까다롭고 복잡했다. 작은아버지와 고모부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기가지 했다.
늦은 밤, K는 고개를 숙이고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그가 향을 피우고 고인에게 절을 했다. 고모가 눈짓으로 누구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주인 나와 그는 맞절을 했다. 상 위에 두껍게 썰어놓은 돼지머리와 누런 전과 불그스레한 쇠고기국은 손도 대지 않아 그대로 기름이 번져 있었다. 그와 나는 음식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간간이 김빠진 맥주를 홀짝였다.
더 이상 문상객이 오지 않자, 고모부와 조카들은 남은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여자들은 동여맸던 상복 허리춤을 느슨하게 풀고 엉덩이를 바닥에 풀썩 내려놓고 허리를 두드리고 어깨를 만졌다. 작은아버지가 대전에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다른 아들들에게 연락을 한 눈치였으나,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맥주 세 병을 비우고 그는 말없이 일어섰다. 그가 한 말이라고는 내가 따라나서자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구두를 신으면서 내 어깨를 세게 한번 잡고는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구두 뒤축을 끌면서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 뒷모습을 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염을 할 때 겨우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모부는 발끝에서부터 비단을 감으면서 이제 더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니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잘 보라고 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제 진정한 영면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는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듯도 보였다. 비단으로 얼굴을 덮는 순간, 아버지의 조용한 미소가 둔황의 관음을 닮아 있다는 것을 퍼뜩 알아챘다. 아,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에 이 얼굴을 새기기 위해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삼년 동안 어슴푸레한 병실에 누워서 그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삼우제를 지낸 후 나는 K와 여행을 떠났다. 주말엔 주로 가족들과 보내는 그가 기분전환을 시켜주겠다며 내 팔을 이끌었다. 팔월의 끝 무렵이었으나 여전히 무더웠으며 사찰 아래 계곡엔 늦은 휴가객들의 텐트가 즐비했다. 후끈한 지열을 치받으며 장사치들의 차일이 늘어서 있기도 했다. 한낮엔 뜨겁게 달궈진 돌에 고기를 구워 먹고 그는 몸이 푸릇푸릇해질 때까지 수영을 했고 나는 발목만 담그고 물큰한 물이끼를 발뒤꿈치로 문질러대며 오후를 보냈다. 산그늘이 내려앉은 계곡에 행락객들이 버리거나 혹 잊고 간 김칫국물이 묻은 두루마리 휴지, 귀퉁이에 흙이 박힌 비누와 라면 봉지, 물에 젖은 모기향 따위를 멀거니 바라보며 삶은 닭을 뜯어 먹고 재처럼 검은 닭죽을 훌훌 불어가며 떠먹었다. 해가 이울고 저녁엔 강물이 붉어지는 걸 보며 천천히 소주를 마셨다.
낙타가 지나간 검은 허공엔 45굴 관음이
미소 짓고 있었다. 관음의 미소는 결코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우주의 삼엄한 침묵을
미소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는 엄마 이름을 두 번 불렀다고 했다. 제를 지내면서 고모에게 들었지만 나는 그 뜻을 몰라 의아하기만 했다. 작은아버지는 아마도 엄마가 묻힌 선산에 합장해달라는 고인의 유언이지 않겠냐고 했고 고모는 고생만 하다가 젊은 나이에 간 엄마에게 죄스러워 한 말일 거라고 했다. K에게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소주를 몇 잔 마신 상태이기도 했지만 끝내 내게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는 아버지가 이제와 새삼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원망할 대상이 사라지자 오히려 내 속에서는 오랫동안 고여 있던 분노가 터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모기가 극성스레 물어대자 슬쩍슬쩍 다리에 침을 바르던 우리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여름용 고무 슬리퍼를 끌고 산길을 걸어 내려와 근처 모텔에 들었다. 이불을 들추자 침대의 흰 시트에 올이 굵고 꼬불거리는 음모들이 환한 조명 아래 드러났다. 짧고 격렬한 성교의 흔적. 그것들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서로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보아버렸다는 듯한 참담함에 서로를 외면하고 몸을 섞었다. 벗은 쇄골 깊숙이, 숨겨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서로의 체모가 부딪치는 따가운 감촉은 사랑인가, 욕망인가, 어둠을 견디려는 헛된 미망(迷妄)이었을까.
그 밤에 나는 그의 등에 내 등을 맞대고선 텅 빈 고비사막의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사찰 아래의 공기 속에는 짙은 향내가 맴돌고 있었다. 오랫동안 죽음 근처를 서성이면서 버티던 아버지가 막상 떠나자 내 마음속은 고비처럼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둔황의 석굴에서 보았던 관음보살의 미소를 닮은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던 밤의 기차도 생각났다.
관음보살과 비천을 만난 탓에 흠뻑 지쳐 있던 둔황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일행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열차 안은 청결했고 객실 침대시트도 정갈했다. 이층침대 두개가 마주보고 있는 4인 1실이었는데, 나를 제외한 세 명이 여고동창쯤 보이는 사이로 보여 괜히 내가 객식구로 끼인 기분도 들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 초로의 여인들은 허물없이 내게 말을 걸고 컵라면과 일회용 커피믹스를 꺼내 놓아 오순도순 나눠먹기도 했다. 커다란 눈깔사탕만한 알전구가 은근하게 침대를 비추어 어린시절의 다락방처럼 아늑했다. 중국인들 특유의 사성의 높낮이를 가진 빠른 말소리들이 옆 객실에서 들려왔는데, 그 말소리마저도 낭랑하게 느껴졌다.
밤이 되면 유성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까 가이드가 별똥별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고 했잖아. 초로의 여인들은 어두워가는 창밖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살아있으면 저 나이쯤이었을 터였다. 나는 아주머니들을 따라 차창 밖으로 어둠이 모포처럼 덮인 고비를 내다보았다. 사막의 밤은 아직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검은색을 내 눈에 선사하고 있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고비의 밤을 칼칼한 검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요동이 이층침대 위에 앉은 내 몸으로 전해져 나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열차엔 안온한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들 잠이 든 것 같았다. 오전에 낙타를 타느라 얼얼한 팔다리로 저녁까지 석굴들을 헤집고 다녔으니 피곤할 것이었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조용히 걸쇠를 풀고 객차 밖으로 나왔다. 시끌벅적하던 다른 객실들도 조용한 걸 보니 모두 잠든 것 같았다. 통로의 큰 유리는 투명한 어둠에 반질거렸다. 청포도 알맹이 같은 저녁별이 광대무변한 사막을 고요히 밝히고 있었다.
처자의 아리따운 옆모습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요. 종일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느라 피곤했을 현장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가요. …. 현장과 나는 나란히 서서 검은 창밖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창문에 어른거렸다. …. 유성이 흩날리는 명장면을 볼 수 있다더니, 우리에겐 행운은 없나 보네요. 그렇지 않아요, 기다려 보세요. 분명 보게 될 겁니다.
사막은 텅 비어 있고 밤은 도시에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치 새까맸다. 칼칼한 검정의 밤이었다. 뜬금없이 암흑의 핵심이라는 소설 제목도 덩달아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이나 영화에서가 아닌 ‘우주’를 대면한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낮에 본 관음보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밤 열차가 텅 빈 적막을 뚫고 나아간다는 사실에 내 마음 깊은 곳은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마음’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그 무엇에 감응하여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나였던 것이 영겁의 한 찰나에 만났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현장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 사막의 밤을 응시하고 있으면 종종 경전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지요. 전광석화의 이심전심이었다. 그러곤 각자 고개를 돌려 검은 유리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간간이 기차의 레일을 밝히는 불빛만이 검은 적막을 또렷이 드러내주고, 우리가 아득한 공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는 기차에 몸을 싣고 완전한 암흑 속을 달리고 있으니 우주의 본질이 텅 비어 있다는 말이, 나는 감히 헤아릴 수도 할 수 없는 말이 어쩐지 감각으로 흡수되는 밤이었다.
아, 보셨나요. 금방 유성 떨어졌는데. 아, 그럴 리가요. 저도 계속 보고 있었는데…. 현장은 소리 내어 허허 웃었다. 혹시 눈을 깜빡거리고 있지 않았나요. 그 순간에 저 산등성이로 내려오던 걸. 현장이 짐짓 손을 들어 허공의 한 곳을 가리켰다. 눈을 깜빡인 그 언저리로 낮에 나를 태웠던 늙은 낙타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낙타는 상처 난 얼굴을 깊이 파묻고 흰 꽃상여를 끌고 검은 허공을 느리게 지나갔다. 커다란 별들이 딸랑딸랑 낙타 방울소리를 내고 있었다. 낙타가 지나간 검은 허공엔 45굴 관음이 미소 짓고 있었다. 관음의 미소는 결코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우주의 삼엄한 침묵을 미소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깊이 잠든 K가 몸을 뒤척이며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이불을 여며주고는 가족도 나도 다 챙기며 부대끼는 그의 피곤한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K의 얼굴을 이렇듯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사찰에서 내려오는 듯한 향내도 짙어지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이제 머지않아 K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음모를 걷어냈어도 이 침대에도 사막의 모래알이 버석거리고 있는 듯했다. 현실의 밤 역시 칼칼한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왜 막고굴에서 본 관음보살에게서 거대한 구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를. 그 소리는 가야할 길을 가는 소리이자, 고통의 소리라는 것을. 또한 관음의 미소는 그것을 받아들인 후의 미소라는 것을. 그리하여 아버지는 내가 타고 있던 낙타를 이끌고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 계신 것이라는 것도.
사십구재를 지내고 K와 저녁을 먹었다. 그는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며 허겁지겁 청국장을 떠 넣었다. 뻑뻑한 콩 알갱이를 숟가락으로 누르면서 나는 준비해온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가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말을 꺼내놓았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매만지면서.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다고, 당신을 낙타처럼 내 옆에 매어둘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푸른 하늘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말하리라. 그렇게 멋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그를 보내고 나면 오랫동안 밤마다 베개를 부둥켜안고 외로워, 외로워, 하고 중얼거리게 될지도 몰랐다.
가을 내내 나는 바람 든 무처럼 뻥 뚫린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와 일상도 버려진 무청처럼 시들하기만 했다. 그 색이 그 색이라고 업자가 목청을 높여도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 속에서 무언가 쑥 뽑혀버리기라도 했는지 허탈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머릿속으로 안다고 해서 마음마저 아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는 때로 지잉, 지잉 귓가를 울리는 관음의 소리를 더 듣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는 관음 스카프를 목에 두르자. 막고굴의 푸른 하늘과 굶주린 화공들의 붓질이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싼다. 뼈가 앙상하던 낙타의 목에도 관음스카프를 둘러주고 싶다. 그 낙타는 잘 있을까. 관음 스카프를 목에 두를 때만큼은 놓아주자. 가을의 칠박 팔일, 그렇게 일주일간은 관음의 계절이니….
오래 전에 사용하다 만 물감을 찾는다. 벌어먹고 사는 일에 바빠 물감을 꺼내본 지도 몇 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동안 굳어버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내 손이 가볍게 떨고 있다. 열한 살에 아버지에게 받은 물감을 만질 때처럼. 아버지는 내게 물감의 색을 아낌없이 칠하면서 외로움을 견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열한 살에 본 하늘도, 서른세 살에 본 벽화 속 하늘도 아버지가 뚫어져라 쳐다본 천장도 모두 우연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우연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필연으로 만들면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나만의 비천색을 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 소설 당선 소감
‘문학의 벌판’ 보여준 지인들 감사
나는 아마도 이 소설을 아버지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쓴 것 같다. 물론 작품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 아버지가 아니며 나 역시 나는 아니지만, 소설 속 인물들 안에 투영돼 있는 진실의 모습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면 나는 다만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요즘 사골곰국을 자주 끊이신다. 여태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손목이며 발목뼈가 영 시원찮은 내게 먹이시려는 것이었다. 가스불 앞에 몇 시간이고 묵묵히 지켜 서서 번들거리는 기름을 숟가락으로 걷어내신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훔쳐보면서 내가 저걸 먹고 뭘 해야 하나 하고 자문하곤 한다.
당선되었다고 하니까 기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우선 마음이 좋다. 지금까지 이끌어주시고 힘을 불어넣어준 선후배, 친구들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 아쉽다. 그분들에겐 또 다른 기회를 기다려 달라고 전하고 싶다.
문학의 드넓고 풍요로운 벌판을 보여주려 하셨던 김중하 선생님과 문학의 길은 농부의 길임을 가르쳐주셨던 윤후명 선생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십수 년 전 같은 과 학생도 아닌 내게 연구실을 열어주신 국문과 조 교수님과 철학과 전 교수님께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젠 공소시효마저 지나서 찾아뵙기도 어렵다. 그분들은 온갖 장서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책이나 열심히 보라고 나를 들여보내셨을 테지만, 실제로 나는 컵라면과 커피를 먹으면서 공상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당시엔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보나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하고 그저 산만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책을 둘러보고 책등을 손으로 쓸어본 촉감은 내게 오래 남아 있어서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내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건드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1970년 서울 출생, 2008년 신라문학상 수상, 현재 문학 강사로 활동.
■ 소설 심사평
주밀하게 직조된 짜임새 돋보여
소설은 작가가 우주 속에 뻗은 뿌리를 통해 빨아들인 거리를 허구로 얽어 엮은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어려 있어야 하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이란 우주 율동의 울림을 말한다.
응모된 소설들을 그러한 기준으로 읽은 결과 ‘퇴화의 탑’ ‘실종신고’ ‘노란 리본이 움트는 은행나무’ ‘활극을 위하여’ ‘승조의 업보’ ‘관음 스카프’ 등 6편을 본선에 올렸다. 그것들을 깊이 읽었다.
‘노란 리본이 움트는 은행나무’는 이야기가 산만하고, 억지스럽다. ‘활극을 위하여’는 끝에 가서 감동을 주지 못한다. ‘퇴화의 탑’은 “~었네” “었다”를 혼동해서 쓰는 까닭을 알 수 없지만, 감수성이 뛰어나고, 이야기도 재미있다. ‘승조의 업보’는 소설적인 장치를 활용할 줄 알고 주제를 이끌어내는 기법도 좋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실종신고’는 밀도 있는 문장을 쓸 뿐만 아니라 감수성도 돋보인다. 주인공 내가 두 번에 걸쳐 성폭행을 당하는데, 내가 거기에 동조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고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전체적인 이야기에 억지스러운 느낌이 든다. ‘관음 스카프’는 견고하고 주밀하게 직조된 짜임새가 돋보인다. 문장도 좋고 주제를 도출해내는 능력, 삶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도 칭찬할 만하다. 아버지의 49제와 나의 여행과 그와 나의 별리(別離)의 들고 남이 신선하면서도 그윽하다.
위의 6편 가운데 아무래도 ‘관음 스카프’가 가장 우위에 선다고 판단해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가에게 축하하고, 건필을 빈다.
[불교신문 2588호/ 1월1일자] 2010-01-01 오전 11:30:55 / 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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