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時調)창작법

말의 감옥, 마음의 길

시인 최주식 2010. 1. 24. 22:59

말의 감옥, 마음의 길


                                          

              

                                           

                                 주경림 시인

                     

                              서울출생 
                                이화여대 사학과 졸업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1993년 시집 [씨줄과 날줄]
                                2000년 [눈잣나무]( 문학아카데미) 
                                시아카데미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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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유비쿼터스 2」(『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마경덕, 「밧줄이 숲을 끌어당긴다」(『불교문예』 06년 가을호)
*구석본, 「말의 감옥」(『시와반시』 06년 가을호)
*허문영, 「물 속의 거울」(『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노명순, 「나의 소」(『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김정임, 「소나무의 집을 보았다」(『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1

 지난 10월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로봇 월드 2006> 전시회가 열렸다. 청소·간병·애완·경계로봇 등을 비롯해 가정·산업·전투용 등이 다채롭게 선보였다. 개막식에서는 아리따운 20대 여성 인조인간 로봇 ‘에버원’이 사회를 보고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가 테이프커팅에 참석하기도 했다. 우리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로봇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바짝 다가온 느낌이었다. 어쩌면 지능형 인공로봇의 보급은 컴퓨터의 확산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프로그램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예술가 로봇도 등장했다. 그런데, 아직 로봇이 소설을 쓰고 시를 짓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과학 문명이 인류의 출현 이후 250만년 동안 줄곧 축적되어온 창의적인 정신과정을 프로그램화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일까.
 키 160cm, 몸무게 50kg의 외모에 사람 피부와 기쁨, 슬픔, 화냄, 놀람의 표정을 짓는 ‘에버원’의 새카만 눈동자가 쉬지않고 살아 움직인다. 인간을 닮은 그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노정은 우리네 삶의 보폭과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연예인 로봇 ‘에버 투 뮤즈’는 시연회에서 입을 한 번 크게 벌리고 그냥 동작이 멈춰버렸다. 목 부위의 핵심 부품인 와이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볼거리를 놓쳐 아쉬웠지만 로봇은 그냥 로봇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로봇에게는 로봇의 길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길찾기에 초점을 맞추어 지난 계절의 시를 읽어본다. 

 누군가 길의 입에 손을 넣어 스위치를 끌어당긴다
 길의 두루마리가 책장처럼 죄악 펴진다 소리들이 깔린다
 소리들을 올라탄 한 두름의 입, 입들을 싣고
 길의 지느러미가 출렁이는 공기를 헤엄쳐나간다
 (이젠 길 스스로가 세상을 떠메고 간다)

 입들은 길이 구불텅, 고개를 넘을 때마다
 와~와~와~길게 소리를 흘리며
 구름 속에 펼쳐진 책 밖의 책을 읽는다
 몇 줄의 기러기가 구불구불 써 놓은 가을 편지도 읽는다

 길이 출렁거리는 공기에 얹힐 때마다 입들은
 꺼내보지 못한 소리도 모두 꺼내어 크게 크게 읽는다
 입들은 너무 많은 소리를 먹어 숨을 몰아쉰다
 잠시 소리들을 게워놓고는
 세상 한 바퀴를 돌아온 지느러미를 품속에 집어 넣는다

 나는 문득 입들이 안쓰러워져서 휴대폰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김지향, 「유비쿼터스 2」

 김지향 시인은 21세기의 첨예한 과학문명을 시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왔다.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가운 기계의 회로에 따뜻한 피가 흐르게 함으로써 인간성의 회복을 꿈꿔왔다. 활달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안내할 때 경이롭기도 했지만 때로는 앞서가는 그의 시세계가 낯설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김지향 시인은 시 「유비쿼터스 2」에서 휴대폰에 전달되는 무선 전파의 파동에 ‘길’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 ‘길’은 물이나 공기처럼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무선의 ‘길’에서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관념의 이미지를 벗겨 독자들 앞에 보다 구체적으로 ‘길의 두루마리’를 좍 펼쳐놓는다. 그 ‘길’은 수동적으로 놓여 있는 정물(靜物)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존재로 살아 움직이는 몸을 갖는다. 육화(肉化)된 ‘길’은 ‘입’과 ‘지느러미’를 갖고 있다. 몸의 일부분으로서의 ‘입’이 아니라 몸 전체가 ‘입’이 되어 시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한다. ‘입’이 본능적인 욕구인 소리내기와 먹는 기능에 충실하다면 ‘지느러미’는 길에 역동적인 힘을 불어넣는다. 마침내 ‘길 스스로가 세상을 떠메고 간다’는 새로운 시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둘째 연과 셋째 연에서는 생명성을 얻은 길의 행로가 다채롭게 전개된다. 고개를 넘고 책과 기러기의 가을 편지를 읽는 등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친근감마저 느껴진다. 김지향 시인의 시적인 기교가 직접 드러내놓지 않고 자연스럽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휴대폰은 현대인의 소통하려는 욕망을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21세기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휴대폰은 문명의 이기라는 차원을 넘어 이미 ‘몸’이 되어버렸을 만큼 말착되어 있다. 시인은 이쯤에서 “입들은 너무 많은 소리를 먹어 숨을 몰아쉰다”며 며 휴대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실의 삶을 경계한다. “지느러미를 품 속에 접어 넣는다”는 행위를 통해 문명 비판적인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 마침내는 휴대폰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 행위를 ‘안쓰워져서’라는 표현으로 정당화시키며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공감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스스로가 세상을 떠메고 가던 휴대폰의 길은 결국 스위치를 끌어당기는 첫 연과 스위치를 꺼버리는 마지막 연 사이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강물을 가로지른 긴 외줄, 참나무 허리에 건너편 물푸레나무가 묶여
 있다. 밧줄의 거리만큼 허공이 좁혀진다.

  7월의 허리통이 한 자나 늘었다. 불어난 물소리에 자박자박 물푸레나무
발목이 젖는다. 물푸레나무숲으로 바람이 밀려가고 물푸레 가지에서 첫
눈 뜬 새소리가 참나무숲으로 밀려온다, 깊은 물소리도 따라온다,

  불안을 묶고 아슬아슬 건너던 밧줄, 출렁이던 무게를 버리고 저리도
태연하다. 멀고 먼 것들, 마주보며 지나치던 것들, 끝내 닿지 못한 것들이
서로를 어루만진다.

  줄 하나 붙잡고 지금 이 산과 저 산이 통화중이다.
 ―마경덕, 「밧줄이 숲을 끌어당긴다」

 김지향 시인의 「유비쿼터스 2」가 무선으로 어디든지 연결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정보의 폭주를 풍자했다면 마경덕 시인의 「밧줄이 숲을 끌어당긴다」는 지극히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강물을 가로지른 긴 외줄은 종이컵을 실로 연결해서 귀에 대던 어린 시절의 전화놀이를 연상시킨다. 참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묶은 긴 외줄을 통해 강물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뛰어넘는다. 참나무와 물푸레나무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바람이며 새소리, 물소리를 공유한다. 비단, 두 나무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서로가 몸담고 있는 물푸레나무숲과 참나무숲도 공동운명체가 된다.
 마경덕 시인은 이성적인 논리에 의존하기 보다는 감각적인 호소로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한다. 밧줄이 숲을 끌어당기듯 시인의 탁월한 언어 감각과 구성력으로 어느새 읽는 이도 스르륵 그 숲에 닿게 된다. 첫 연에서는 ‘밧줄의 거리만큼 허공이 좁혀진’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독자의 눈을 열어준다. 둘째 연에서는 바람, 새소리, 물소리 등으로 청각적인 호소를 통하여 소통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바람이 밀려가고 새소리가 밀려오는 등 숲의 일렁임으로 입체적인 공간이 된다. 숲의 배경을 묘사할 때 ‘허리통이 한자나 늘었다’, ‘발목이 젖는다’ 등에서 보여준 인체적인 비유가 더욱 친근감을 자아낸다. 또한 자연친화적인 생각의 향방이 결국 셋째 연에서 자연스럽게 상호 인간관계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제, ‘멀고 먼 것들, 마주보며 지나치던 것들, 끝내 닿지 못한 것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완벽한 소통의 공간이 이루어진다.
「유비쿼터스 2」에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의 양에 힘겨워 했다면 밧줄을 수단으로 하는 아닐로그적 소통의 공간은 서로를 어루만지며 위로받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롭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인위적으로 휴대폰 스위치를 꺼버림으로써 단절될 수 있다. 그 반면에 줄 하나를 붙잡고 소통하는 아날로그적 삶은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받기 위해 계속 통화중인 세상이다.

 말 속에 말의 감옥이 있다
 그대가 어느 날, 거울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자
 거울은 사라지고 사랑이 문득 갇혔다
 말 속에 갇혀,
 허옇게 앉아 있는 그대의 사랑을 향해
 유리진열장 속의 항아리 같다
 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항아리처럼 적막하게 말 속에 놓여 있다
 무덤 같은 말의 감옥 속에 순장(殉葬)된 그대의 사랑이
 여전히 꽃을 노래하여 꽃을 가두고
 새벽에 홀로 흘리던 흰머리 사람의 눈물을 노래하여
 눈물을 가두고
 노래 속에 묻어 있는 슬쓸함까지 가둔다
 말 속에 갇혀 스스로의 모습을 지우고 지워
 말 앞에서, 노래 앞에서, 모두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노래하던 그대,
 뒤통수만 보인 채 거울 속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구석본, 「말의 감옥」

 구석본 시인은 소통하는 방법으로 갇힘을 택한다. 따라서 「말의 감옥」은 넓이보다는 깊이에 치중하는 사색적인 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은 갇힘의 장소로서 거울을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물론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이 반드시 진실의 나와 일치될 수는 없겠지만 그대로 비쳐준다는 거울의 보편적인 속성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구석본 시인은 이러한 거울의 보편적인 속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 자리에 ‘무덤 같은 말의 감옥’ 이라는 낯선 공간의 이미지를 끼워넣는다. 즉, 거울은 갇혀서 지우고 지워 사라져가는, 떠나가고 있는 공간이 된다.
 구석본 시인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하’며 소리를 비쳐본다. 그러나 거울은 소리를 반영(反影)해 내지는 못한다. 말은 거울 밖과 거울 속에서 단절될 뿐이다. 소리가 없는 거울 속은 스스로 깊어져 유현(幽玄)한 세상으로 열린다. ‘유리진열장 속의 항아리’란 빤히 보여도 직접 만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대의 사랑을 향해 “유리진열장 속의 항아리 같다”라고 말하는 순간 무덤 같은 말의 감옥 속에 사랑은 순장(殉葬)되고 만다. 거울은 모습을 비쳐주듯 말을 비춰줄 수는 없으므로 말 그대로 감옥이 된다. 육체의 눈은 말이 지니는 의중을 짚어볼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그 말의 배경까지 잘 볼 수 있다. “뒤통수만 보인 채 거울 속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라는 마지막 연으로 미루어 거울 속의 ‘말의 감옥’은 더 이상 갇히는 공간이 아니다. 놓아주고 풀어주는 공간으로 열린다.

 누군가 개울물 속에다 빛 바랜 거울 하나를 버렸나 보다, 돌틈에 눌려 깨어질 듯 쓰러져 있는 거울은 아직도 빈 하늘을 비추고 있다. 차가운 개울물은 거울의 온몸을 넘나들며 은빛 영혼을 닦아주고 있다. 나의 과거사처럼 거울에게도 추억거리가 남아 있으리라.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은 셈인데 그 누군가의 얼굴도 거울 속에 메모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반짝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는 유달리 거울을 닦고 또 닦았다. 일곱 식구의 얼굴을 오랫동안 비추고 있는 거울에게 고운 정이 들었을 것이다. 이제 거울이 단풍색으로 물들었다. 물속의 거울 위로 눈이 빨간 열목어들이 모여들었다. 가시고기 한 무리도 거울 위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갔다. 사람이 버린 거울이 개울가 살아 있는 것들의 거울이 되었다. 나는 개울 속 너른 모래무덤 위에 거울을 옮겨 놓았다. 들여다보니 물속의 거울 안에 주름진 얼굴이 있다. 그 옆에 더 주름진 얼굴이 일렁인다.
―허문영, 「물 속의 거울」

 구석본 시인이 「말의 감옥」에서 사라져 떠나가는 깊이가 있는 공간으로 거울 속의 이미지를 살려냈다면 허문영 시인의 「물 속의 거울」은 넓이를 갖는 공간이다. 빈 하늘, 추억거리, 단풍 등과 열목어와 가시고기 한 무리까지 다 비추어준다. 풍경은 밖에서 거울 안으로 들어오고 이내 안에서 밖으로 다시 투시되며 안팎의 풍경이 어울려 시인 자신의 내면의 풍경으로 완성된다.
 일상적인 사물이 시적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허문영 시인의 거울은 모습을 그대로 비춰보는 것 외에 자신만의 독특한 시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된다. 개울물 속에 버려진 빛 바래고 돌틈에 눌려 깨어질 듯 쓰려져 있는 버려진 거울을 시적 소재로 삼는다. 허문영 시인은 한낱 버려진 거울에 새로운 생명성을 부여해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는 현존재로서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버려진 거울은 “차가운 개울물은 거울의 온몸을 넘나들며 은빛 영혼을 닦아주고 있다”라는 일종의 씻김의식을 거쳐 새생명으로 거듭난다.
 빈 하늘을 비추고 있던 거울은 이제, 메모리 속에 일곱 식구의 얼굴을 비춰주던 어머니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의 거울에서 시인은 문득 식구들의 얼굴과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 솟아났을 것이다. 허문영 시인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이쯤에서 다시 개울물 속의 거울로 돌아간다. 단풍색으로 물들은 거울에 눈이 빨간 열목어들, 가시고기 한 무리들이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그 정겨운 광경은 환상적인 공간으로 연출된다. 자신의 일곱 식구 얼굴에서 슬쩍 가시고기 한 무리의 가족사진으로 옮겨간 시인의 솜씨가 일품이다. 메모리에서 현재로 돌아와 시인은 모래무덤 위에 거울을 옮겨놓고 자신만의 풍경, 자신의 길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를 마무리 짓는다.

 소를 잃어버렸다
 이중섭의 소도 아니고
 불가의 그림에서 어슬렁거리던 소도 아니었다
 내 짐을 잔뜩 짊어진 아버지가 유일하게 물려준
 나의 소였다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상점에서 소 고삐를 놓은 채
 탐나는 물건들을 흥정하고 있는 동안에
 사라져 버렸다
 내 옆에서 잠깐 쭈그려 앉아 쉬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자거리엔 검은 소, 흰 소 많은 소가 지나다녔지만
 몸이 붉은 나의 소는 없다
 눈이 유난히 크고 몸집이 작은 나의 소
 네 갈래 길 저자거리를
 나는 우왕좌왕 정신없이 찾아헤맨다
 찾을 길이 없다
 아버지 소, 나의 소.
 ―노명순, 「나의 소」

 노명순 시인의 시는 가슴으로 읽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원초적인 서정성의 충일함을 맛보게 된다. 「나의 소」는 시인의 풍부한 감성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까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현실적으로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고 일생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면서 자신의 참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참모습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명순 시인은 “소를 잃어버렸다”는 첫 행으로 시작해서 “찾을 길이 없다”는 마지막 행으로 시를 끝낸다. 언뜻 보면 진전이나 아무런 성과도 없어 보인다. 바로 이 점이 시, 「나의 소」가 독자의 시선을 끄는 매력일 수 있다. 요즈음은 저마다 목청 돋우어 자신을 주장하는 자기 PR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이든 정신이든 확신에 찬 모습 앞에 서면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또한 무슨 일이든 과정은 어찌되었든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노명순 시인은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와는 상관없이 경쾌한 행보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자신의 내면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그 가식 없는 진실함이 읽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소’의 이미지에서 떠올릴 수 있는 기존의 관념을 덜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비운과 현실적인 분노를 드러낸 ‘이중섭의 소’를 덜어낸다. 불가에서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인 소 찾기의 비유에서 소를 덜어낸다. 시인이 찾는 ‘나의 소’는 삶의 구원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이나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가치 추구 등의 거대한 명제가 아니다. 시인은 ‘내 짐을 잔뜩 짊어진 아버지가 유일하게 물려준 나의 소’를 찾을 뿐이다. 독자는 ‘내 짐을 잔뜩 짊어진’에서 개인적인 비애나 운명의 엄숙함에 공감한다. 그리고 연민의 감정으로 저마다 자신의 등짐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물려준’에 이르면 핏줄을 타고 면면히 흐르는 유전적인 어떤 힘을 느낄 수 있다. 태생적이라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예술인으로서의 ‘끼’가 아닐까. 이렇게 보면 노명순 시인의 시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어쩌면 시를 열심히 쓰고 행위 예술로서 시극 축제를 벌이며 몰입하는 그 일이 ‘눈이 유난히 크고 몸집이 작은 나의 소’를 찾는 노명순 시인만의 심우도(深牛圖) 라는 생각이 든다.

 수타산 중턱에서 커다란 적송 그루터기를 보았다
 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는 송화빛 톱밥이
 숲으로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이제 소나무는 200년의 생애를 밑동에 꾹꾹 눌러 담고
 나이테 속으로 사라졌다
 마음의 길을 가늘고 촘촘하게 새겨놓고 떠났다
 틈 없이 새겨진 나이테의 흔적에서
 소나무가 남긴 단단하게 여문 생의 기록을 보는 것 같았다
 바람과 햇빛이 수만 번 다녀간 뒤
 나이테의 빗금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소나무는 이제 지상의 집 한 채 완성하러 떠났다
 단단하고 굵은 그의 흰 뼈가 사원의
 배흘림 기둥으로 서서
 한세월의 무게를 오랫동안 받쳐들 것이다
 수타산 중턱 적송 그루터기는
 온 숲을 채우기도 하고 다시 비우기도 한다.
 ―김정임, 「소나무의 집을 보았다」

 김정임 시인의 시 「소나무의 집을 보았다」에는 물리적인 죽음을 초월한 영속(永續)의 시간이 담겨 있다. 적송 그루터기 나이테의 흔적은 마치 그 영속의 시간 속에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진과도 같다. 적송을 베어낸 자리인 그루터기를 한세월의 무게를 오랫동안 받쳐들 ‘사원의 배흘림 기둥’으로 변신시킨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김정임 시인은 상상력을 전개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행간을 뛰어넘는 비약을 하거나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세심한 관찰력으로 한 행씩 나아가며 점층적인 효과를 거두는 시인의 행보가 가히 모범적이라 할 만하다.
 먼저, 벌목 현장에서 톱날 밑에 뭉개진 목질의 조각들인 ‘톱밥’을 보는 시인의 눈이 밝고 희망적이다. 상처의 흔적일 수 있는 톱밥을 송화빛 꽃의 색감으로, 그 냄새를 향기가 숲으로 퍼지는 것으로 표현한다. 벌목은 소나무에게 죽음이 아닌, 죽음을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을 예비한다. “소나무는 200년의 생애를 밑동에 꾹꾹 눌러 담고 나이테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시인은 그 촘촘한 나이테에서 소나무의 ‘마음의 길’을 짚어가며 ‘단단하게 여문 생의 기록’을 본다. 이제, 그루터기의 나이테는 시인의 마음이 투사되어 시인의 마음의 길과 교감을 나누는 주관적인 풍경이 된다.
 소나무 중에 제일은 적송인데 적송은 나이테가 좁고 붉다는 도편수 신용수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나이테가 넓으면 쉽게 자란 나무로 속이 무르고 쉽게 터진다고 한다. 또한 험한 환경에서 자란 적송일수록 나이테가 좁고 단단한데 사람 또한 그렇다고 한다. 물리적인 죽음 이후 그루터기가 더 이상 나이테를 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인의 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람과 햇빛으로 더욱 깊어질 나이테의 빗금을 내다본다. 그리고 그루터기에서 완성될 지상의 집 한 채를 미리 지어본다. 시인이 차곡차곡 짚어간 마음의 길은 그루터기에서 세월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향토성이 짙고 서정성도 풍부하며 차분하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도대로 시를 끌고 가는 솜씨 또한 나무랄 데 없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때로는 허를 찔리기도 하는 예측 불허의 세상살이 모습도 더러 소재로 삼아보면 어떨까. 김정임 시인의 시의 지평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

2

 김지향 시인은 「유비쿼터스 2」에서 불가시적인 무선회로의 차가운 피를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으로 능숙하게 자리바꿈했다. 그 반면에 마경덕 시인은 줄 하나 붙잡고 이 산과 저 산이 통화중인 아날로그적 소통 방식을 통해 서로를 위안하고 어루만지는 데 성공을 거둔다. 오히려 거울 속에 말의 ‘갇힘’을 통해 더 깊은 소멸의 세계를 열어간 구석본 시인의 「말의 감옥」과 「물 속의 거울」에서 환상적인 시의 세계를 연출한 허문영 시인의 언어 운용의 묘(妙)도 눈여겨 볼만하다. 노명순 시인의 「나의 소」에서는 가식 없는 진실함과 무기교의 순박함이 정신의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김정임 시인은 「소나무의 집을 보았다」에서 마음의 길을 짚어 그루터기에서 세월의 무게를 받쳐들 소나무의 집 한 채를 거뜬히 지어냈다.
 피카소가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고 했다. 요즘같이 물질문명에 눌리어 정신적으로 핍박해진 시대에 시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는지 자문해 본다. 시로써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밝고 맑아지며,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 뿐 아니겠냐고 스스로 자위를 해보기도 한다. 아무튼 시인들이란 시를 통해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구원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은 이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멀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기에 가끔씩 자신의 행보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길 위에서 다시 길을 찾는 외로운 구도의 행각을 묵묵히 이어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