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時調)창작법

언어로 짓는 집의 몸, 몸의 집

시인 최주식 2010. 1. 24. 23:00
언어로 짓는 집의 몸, 몸의 집

                             주경림(시인)

              

                      서울출생 
                      이화여대 사학과 졸업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씨줄과 날줄](1993년)
                     [눈잣나무](2000년 문학아카데미) 
                     시아카데미 동인



*이유경, 「집부수기」(『시안』 06년 봄호)
*박제천, 「비의 집」(『문학과 창작』 06년 봄호)
*김신용, 「도장골 시편」(『문예중앙』 06년 봄호)
*김선태, 「鳥葬」(『현대시학』 06년 4월호)
*유가형, 「순간」(『문학과 창작』 06년 봄호)
*곽문연, 「역삼동 안마사」(『문학과 창작』 06년 봄호)
*이병철, 「꽃의 다비식」(『다층』 06년 봄호)
*최송강, 「즐거운 낙지」(『문학과 창작』 06년 봄호)


1

인간은 누구나 ‘宇宙’라는 큰 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간다. 천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宇宙의 ‘宇’자는 천지 사방이라는 공간적인 넓이 또는 ‘天’의 의미를 가지며 ‘宙’자는 과거로부터 미래로의 시간적인 연결로 즉, 공간과 시간의 전부를 포함한 뜻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서 몸담고 있는 이곳이나 죽어서 가는 그곳 역시 ‘宇宙’ 아닌 곳이 없을 것이다. ‘宇宙’에서 은하계, 태양계, 지구로 삶의 터전을 차츰 좁혀오면 가족을 이루고 몸을 쉴 수 있는 보금자리로서의 ‘집’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몸’ 또한 정신이 담기는 ‘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살았을 때 사용했거나 아꼈던 물건을 무덤에 함께 묻어주기도 했다. 고구려 수도였던 연변 집안(集安)에서 발굴된 태왕릉(太王陵)이나 천추총(千秋塚)의 무너진 돌무지 속에서 나온 벽돌에는 ‘산처럼 뫼처럼 튼튼하소서’(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천추만세 동안 영원히 튼튼하여라’(千秋塚千秋萬歲永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죽은 왕의 집인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했던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염원과는 달리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워진 집은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무너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몸의 집’은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호에는 시인들이 언어로 짓고 부수는 집의 몸, 몸의 집에 관한 시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사람 다 비운 채 반년을 버티던 그 삼층집
어제 불도저 두 대가 짜고 와서
무정하게 물고 밀어 패대기쳤다
저항하듯 일던 먼지 찬물 샤워에 진압됐고
수십 년 절은 그림자 모조리 지워졌다
그리고 오늘
낯선 증기차 한 대 기어 다니며
추억 찌꺼기 모아
트럭 짐칸 가득가득 실어내어주고 있다

잘 가거라!
한 시절 징발됐다 딴 데로 합류하는
우리 삶의 이웃들
―이유경, 「집 부수기」

이유경 시인의 「집 부수기」는 우리가 ‘재개발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인은 불도저 두 대와 중기차 한 대로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감쪽같이 치워지는 광경을 주관적인 감정의 개입 없이 한발자국 물러서서 보도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에서 아쉬움이나 섭섭함, 무상함의 감정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경쾌하고 간결한 언어의 리듬감으로 ‘집 부수기’의 현장이 마치 아이들이 레고 블록으로 만든 집을 신나게 짓고 부수며 놀이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놀이의 주체는 “불도저 두 대”로서 이유경 시인은 “짜고 와서”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활약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파괴 행위는 이미 계획된 것이므로 각본대로 “무정하게 물고 밀어 패대기쳤다”로 신속하게 임무를 완성한다. 시인의 시선이 “불도저 두 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독자의 마음의 눈은 불도저 밑에서 수동적으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삼층집”이 무너지는 처참한 광경을 극명하게 떠올리게 된다. 독자의 자연스러운 시의 행간 읽기가 이루어짐이 바로 시, 「집 부수기」가 갖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이유경 시인은 독자의 이러한 애석함을 곧바로 다음 행에서 “저항하듯 일던 먼지”의 흔적으로 뒷받침 해준다. “수십 년 절은” 삶의 흔적은 지워지고 “찬물 샤워”에 진압되어 그 잔해가 트럭 짐칸에 실려나감으로써 ‘집 부수기’의 풍경은 완성된다.
시인 자신이 “구파발에서의 여러 풍경을 보면서 나는 사물의 하잘것없음과 무가치함에 대해 많은 시달림을 겪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연의 “잘 가거라!”는 인사가 주는 어감은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진다. 이제 시인에게는 무너짐이나 사라짐은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린 것일까? 어두운 소재를 “잘 가거라!” 한 마디로 밝게 전환시키는 데는 시인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시인이 트럭에 실려가는 추억 찌꺼기에 묻은 삶의 편린들과 그 아픔을 “잘 가거라!”에 뭉뚱 담아 독자에게 내놓는 산뜻한 포장이 바로 시, 「집 부수기」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추억의 찌꺼기”들은 그냥 사라짐이 아니라 재생의 길이 열릴 법도 한 “딴 데로 합류하는 우리 삶의 이웃들”이기에 아쉬움을 달랠 수가 있다.

아마,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
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
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
아마,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었지
힘을, 주어서도 안 되고---
그저, 가벼히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
그리,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아마,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
문득, 지금은 곁에 없는 병든 아내가
혼자, 눈잣나무 되어 비를 맞는 것으로 보였어
그만, 나도 비에 젖으며 그렇게
그냥, 가벼히 떨리는 듯한 눈잣나무에 기대고 있었어
―박제천, 「비의 집」

이유경 시인이 물리적으로 형체가 사라지는 ‘집’ 앞에서 느끼는 애석함이나 참담함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박제천 시인의 「비의 집」은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시인이 상상력으로 지은 환상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비의 집」은 형체가 아닌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로운 분위기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시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앞서 읽고나면 따뜻함이나 푸근함, 혹은 눈물겨움으로 그 감동의 물결이 전해질 때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제천 시인의 「비의 집」은 비를 맞는 눈잣나무의 미세한 떨림까지 독자들의 마음에 파장이 긴 여운을 남긴다. 그 감동은 시인의 생생한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욱 강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십 여년에 이르는 시적 여정과 시적 성취에 미루어 볼 때 노장의 사상, 무속과 주역, 불교와 성리학 등을 꿰뚫어보며 독자적인 한 세계를 이룩한 시인으로서 시 「비의 집」에선 확신에 찬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이미지화 시키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마”, “비가”, “아니”, “그래” 등의 부사어구로 시의 각 행을 열어가며 쉼표로 호흡을 한 번 고른 다음에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독자에게 한 장씩 그림을 보여주듯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교감을 나누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시의 배경이 된 “눈잣나무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비와 눈잣나무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라는 행을 곧 바로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로 반복한다. 즉, 눈잣나무는 단순히 비를 맞는 객체가 아니라 비의 주체가 된 것이다.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비는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이 되고 차츰, “가벼히 껴안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는 사이에 눈잣나무와 비는 한 몸으로 젖어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로운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인 “나도” 비에 젖으며 눈잣나무에 기대어 섬으로써 「비의 집」은 완성된다. 「비의 집」에서 독자는 슬픔을 응시하며 견뎌내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제천 시인이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지어갈 몸체가 없는 그 집들의 형상화가 기다려진다.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뚱이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김신용,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이번에는 집 없는 민달팽이를 시적 소재로 삼은 김신용 시인의 시를 살펴보겠다. 시인은 처음에는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민달팽이를 동정어린 눈길로 지켜본다. 차츰 그 여유로움에서 운수납행하는 자의 유유자적함을 읽어내며 ‘우주율의 발걸음’ 이라고 이름붙이기에 이른다.
일용직 노동자 시인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의 시에는 ‘제7회 천상병문학상’ 수상작인 「환상통」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통증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고통스러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도장골 시편」에 이르면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무척 관대해졌음을 볼 수 있다. 생의 비의(悲意)를 읽어내기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시를 전개해나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고 햇살이 닿으면 말라 바스라질 것 같아 무방비로 노출된 삶으로 민달팽이를 애처롭게 보는 것은 오직 보는 이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민달팽이의 그 모습 그대로, 느릿느릿한 보폭을 산책이나 오수(午睡)를 즐기는 여유로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집도 없는 저것”의 이미지가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의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된 존재까지 거듭난다. 민달팽이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를 디오게네스나 운수납행의 구도 행각으로까지 승격시키는 시인의 상상력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선사한다. 무방비로 열어놓은 피부가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로 재인식되며 우주의 일원인 생명으로서의 보편성인 “우주율”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연의 “치워라, 그늘!”은 민달팽이의 외침이라도 좋고 시인이 자유롭고자 하는 자신에게 혹은 독자에게 던진 말 한마디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 시를 읽는 묘미가 한층 깊이를 더한다.

티베트의 드넓은 평원에 가서
한 사십 대 여인의 조장을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겨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잘게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을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도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시종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생전 못된 놈의 시신은 독수리들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슬퍼한다고 했다.

언덕길을 내려오다 들꽃 한 송이를 보며
문득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원의 풀과 나무들도, 모래알도, 독수리도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는 꾀죄죄한 소년들이 어김없이
허리를 굽히며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까웠다.
―김선태, 「鳥葬」

김선태 시인은 육체는 새에 의해서 하늘로 운반된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 티베트인의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통해 몰락이 아닌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혼을 독수리를 통해 하늘로 날려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옷”을 벗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인은 시의 전반부에서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라마승들의 의식 행위를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해나갔다. 신속한 절차를 위해 독수리에게 잘 먹히려면 영혼의 집인 ‘몸’은 잘게 부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독수리에게 남김없이 먹힘으로써 장례 의식은 성공적으로 치루어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순히 ‘鳥葬’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에서부터 김선태 시인의 심안(心眼)으로 들여다 본 풍경이 드러난다. 의도적으로 “허, 공” 이라고 표기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유도한다.
‘허공’은 ‘텅 빈 공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생, 멸의 순환 고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이어지는, 모든 의미를 초월해 있으면서 또한 허공은 우리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허공은 무덤인 동시에 만물이 태어나는 자궁으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은 슬퍼하지 않고 평온한 유족들의 표정과 경건한 스님의 표정이 믿기지 않았지만 차츰, 죽음이란 것이 삶의 과정 중의 하나일 뿐임을 인정함으로써 “평원의 풀과 나무들도, 모래알도, 독수리도/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에 이른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로 온 우주 만물은 서로 깊은 인연 관계 속에 놓여 삶과 죽음이 둘일 수 없는 까닭을 보여준다.
김선태 시인은 주로 고향인 남도를 시적 배경으로 삼은 토속적인 기행시편 형태의 서정시로 주목을 받았는데, 시 「鳥葬」에서는 이국적인 장례의 풍습에서 삶의 보편성에 접근하려는 변모를 보여주어 앞으로 다양하게 전개될 그의 시 세계가 자못 궁금해진다.

비단벌레가 얼마 남지 않은 삶과 후회와 미련을 사각사각 파먹는다 식성이 좋아 마지막 허무의 잎맥만 앙상하게 대롱거린다

몇 미리나 남았을까? 목 아프다, 저 나뭇잎 언제 떨어지나 지루하다는 것이 가당찮기나 한 것인가?

캄캄한 순간이 아찔하게 지나가자, 하늘이 갈라진 듯 소나기 한 줄기가 천둥을 치며 쏟아진다 순간이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를 헤엄치는 영혼, 순백의 새 한 마리 마른 삶의 진액을 뚝뚝흘리며, 서녘 붉은 하늘을 찢고 사라지자 빈 유리잔에 차고 두려운 허탈감이 넘친다

마음의 앵기 발가락이 시퍼렇게 저리다
―유가형, 「순간」

유가형 시인의 시 「순간」에도 영혼을 나르는 “순백의 새 한 마리”가 등장한다. 새가 인간에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준다고 믿었던 조령신앙은 고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으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이래, 무덤과 제사 유물에서 새 모양의 토기와 새무늬 청동기 등을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순간」은 비단벌레의 죽음을 오브제로 삼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단벌레의 죽음으로 허탈감에 빠지고 마음이 저려온다면 설득력을 얻기에는 지나친 과장일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 “비단벌레”는 유가형 시인과 아주 가깝거나 절친한 사람의 은유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시의 오브제가 된 비단벌레, 순백의 새 한 마리, 빈 유리잔 등의 이질적인 언어들의 충돌 효과로 빚어지는 환상적인 세계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첫 연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 과 “허무의 잎맥만 앙상하게 대롱거린다”로 미루어 아마 죽음이 곧 임박한 환자의 여윌 대로 여윈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유가형 시인이 많은 곤충들에서 하필이면 비단벌레를 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 연에서 비단벌레의 몸빛깔이 초록색이라는 점에 착안하면 초록색 몸 빛깔과 잎사귀가, 여윈 몸과 허무의 잎맥이 동격이 된다. 비단벌레가 파먹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이며 또한 잎사귀인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둘째 연을 대하면 시인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남을 읽을 수 있다. “지루하다는 것이 가당찮기나 한 것인가?”는 유가형 시인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표현으로 결정적인 때에 이르렀음을 암시해준다. 셋째 연은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며 시공을 뛰어넘는 장면 묘사로 죽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치 천지 창조의 그날처럼 혼미한 순간이 지나 “순백의 새 한 마리” 로 영혼의 육체 이탈이 이루워진다. 천둥과 고요, 순백의 새와 서녘 붉은 하늘 등의 원색적인 색감대비는 강렬한 메시지의 전달과 함께 황홀한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들의 넋을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느닷없이 등장한 빈 유리잔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친지의 죽음을 지켜본 시적 화자의 슬픔일 것이다. 이미 각오했던 죽음이므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를 “차고 두려운 허탈감”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복받치는 슬픔은 가라앉았다해도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저려옴이야….
유가형 시인의 시에는 주격이 생략되어 처음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감이 앞선다. 차츰, 뭉뚱그려 표현하며 거침없이 밀고나가는 시적 내재율에 익숙해질 때면 말귀 밝은 독자들은 화려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그의 시적 세계의 묘한 매력에 사로잡힌다. 감각적이고 빛깔 있는 시각 언어들이 보여주는 순발력은 시인의 큰 장점으로 손꼽을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충격을 덜어주는 완충장치가 더러 마련되었다면 비단벌레에서 순백의 새, 유리잔에 이르는 ‘순간’이 좀더 공감을 자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에 뭉쳐 있는 아픈 내력들이 슬슬 풀린다
돌아누우세요 사람의 몸이란 참 기특하지요
이 험난한 세상의 어둠을 다 먹어치우니 말이에요
더듬더듬 그녀의 손길이 통증을 짚어낸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알듯 말듯 미소짓는 그녀
차라리 못보고 사는게 행복이죠
내 손길로 뭉친 혈을 풀다 보면
내 눈 속의 어둠이 세상을 읽어요
그녀가 몸에 부황을 뜬다
몸이 몸을 읽는다

독한 것일수록 부드럽게 다스려야 해요
아픈 곳을 다독이면 얽힌 고리가 풀리지요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에
내 몸 켜켜이 쌓인 욕심이 지워진다.
―곽문연, 「역삼동 안마사」

곽문연 시인에게 ‘몸’은 정신과 육체가 완벽하게 화해하는 공간이다. 안마사의 손길로 몸의 통증이 풀리면 욕심도 지워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안마사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고자 한다. 맹인 안마사의 발달한 손의 촉각은 시적 화자의 몸에서 통증을 읽어내고 뭉친 혈을 풀어낸다. 그 몸의 통증은 바로 “험난한 세상의 어둠”에 기인한 것으로 안마사는 자신의 “눈 속의 어둠”으로 “세상의 어둠”을 읽어낸다. 즉, 안마사는 환자의 몸에 뭉친 혈을 풀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손의 촉각으로 김지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시인은 시의 내용이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그녀가 몸에 부황을 뜬다”라는 구체적인 의료 행위를 삽입한다. “눈 속의 어둠”으로 “세상의 어둠”을 읽는 보편성에서 “몸이 몸을 읽는다”로 좀더 세분화된다. 몸이 몸을 읽는 방식에 대한 좀더 세밀한 묘사로 시의 내용이 심화되었다면 시적 성취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역시 몸의 통증 다스리기와 다름 아니다. “독한 것일수록 부드럽게 다스려야” 하는 몸은 세상의 축소판인 셈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혹은 독자들에게 “아픈 곳을 다독이면 얽힌 고리가 풀리”는 이치로 세상의 어둠을 밝혀내라고 혹은 이겨내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종일 타오르다 재만 남은 새벽
잿더미 속에서 달빛에 그슬리는 봉오리
저건 튼튼한 관이다
침묵을 뒤집어쓴 검은 불씨들은
허공으로 꽃향기 날리고
생목 타는 냄새가 풍경소리를 낸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두꺼운 문
나뭇잎들이 웅얼거리는 장엄염불 소리
회색 승복을 받쳐 입은 안개가
이마를 바닥에 댄다
동자승 마냥 파릇이 머리 깎은
무덤이 꾸벅꾸벅 졸음에 잠긴다
별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질 때
빈손으로 돌아가는 어둠
먼동이 몰고 온 바람에
밤새 마동도 않던 봉오리가 열린다
숯처럼 달아오른 붉은 꽃잎 위로는
차가운 사리 몇 알 힘겹게 맺히고
―이병철, 「꽃의 다비식」

이병철은 올해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새내기 시인이다. 꽃의 개화를 다비식으로 풀어내는 역발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새롭게 피어나기 위해 혹은 거듭나려면 자신의 몸, 자신이 몸담고 있던 집을 무너뜨리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할 것이다. 시인은 꽃을 피우기 위해 소신공양하듯 ‘다비식’을 택한다.
밤새 스스로의 열정으로 소진되어 재만 남은 새벽에서부터 그 다비식은 꽃을 피우기 위한 진통은 더욱 심해진다. “튼튼한 관”과 “두꺼운 문”은 스스로의 힘으로 열기에는 역부족이라 종교적인 경배 의식인 예불, 또한 장엄하게 베풀어진다. “나뭇잎들이 웅얼거리는 장엄염불 소리/ 회색 승복을 받쳐입은 안개가 이마를 바닥에 댄다” 등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종교의 힘뿐 아니라 또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야하므로 달빛, 별들, 바람 등의 생존 원리인 우주적 파동에 몸을 맡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밤새 미동도 않던 봉오리가 열린다”
결국 봉오리가 열려 피어난 꽃이란 숯처럼 달아오른 불꽃으로 생을 다 불살라 얻어진 대가인 셈이다. 이십 대의 시인이 어쩌면 자기의 젊음을 다비식으로 열어갈 가열찬 삶을 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숯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젊음이 쏟아낼 차가운 사리와 같은 시들이 기다려진다.

낙지는 몸 전체가 쾌락 기관인가
바닷물에 젖은 물때를 칼이 긁어주면 시원하다고 몸을 흔든다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식도를 칼칼칼 웃으머 받는다
칼에 제몸을 착 달라붙이고, 애인을 만난 듯 캄캄한 내 입속으로 엉겨 붙는다
낙지는 은밀한 동굴 같은 입 안에서 팔다리를 부서뜨리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일까
토막 난 몸들이 뒤집힐 때 잘려진 마디마디에 쾌락의 물빛이 번들거린다
여덟 개의 다리에 주렁주렁 달았던 무거운 바닷내음이 토막토막 잘리고
낙지는 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즐겁게 놓아버린다
흡반이 질겅질겅 씹힐 때 딱 붙이고 다녔던 생이 가볍게 놓아지는 한순간의
스릴을 그는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지는 내려오는 칼을 보고 사정射精한다
칼에 몸을 비빈 낙지가 거품을 뿜으며 내 혓바닥과 하나가 된다
내 혀 위에 정액이 그득하다
―최송강, 「즐거운 낙지」

이병철 시인의 「꽃의 다비식」이 성인의식을 치루듯, 시종 엄숙하고 진지했다면 올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한, 역시 새내기인 최송강 시인의 「즐거운 낙지」는 시 지체가 ‘쾌락기관’(?)처럼 웃음을 선사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곧 잡혀먹힐 낙지의 곤혹스러운 입장인 비극마저 경쾌한 놀이로 만드는 시인의 언변과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시인의 감각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은 마치 오브제인 낙지가 죽음의 칼 앞에서 명연기라도 하는 배우처럼 천연덕스럽게 제몫의 역할을 다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시적 화자와 낙지와의 먹고 먹히는 관계를 세속적인 사랑의 행위로 풀어간 시인의 상상력은 놀라울 뿐이다. 그 관계는 “엉겨붙는다”에서, 팔다리를 부서뜨리며 토막난 몸들로 뒹구는 가학적인 “오르가즘”으로, 마침내는 “사정한다”로까지 점층적으로 발전되어간다.
독자는 도입부, “식도를 칼칼칼 웃으며 받는다”에서는 웃으며 가볍게 넘기면 그 뿐일 것이다. 그러나 “낙지는 내려오는 칼을 보고 사정射精한다”에 이르면 편하게 웃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죽음을 눈앞에 둔 낙지의 종족 보존 본능의 어떤 긴박감이나 위기감이 덮쳐온다. “칼에 몸을 비빈 낙지”와 “혀 위에 정액이 그득하다”에 이르면 더 이상은 스릴이 아니라 생의 비애가 비릿하게 풍겨오기까지 한다.
과연 시인이 「즐거운 낙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최송강 시인은 전방위적인 상상력과 엽기성을 동원해서라도 낙지와의 시적 화자 사이의 먹고 먹히는 긴장과 충돌의 관계를 즐거움으로 완화시키며 낙지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거기에 지루한 일상의 삶을 견뎌나가는 방식으로 웃음을 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그의 시세계가 어떻게 증폭될지 기대된다.


3

이상으로 이유경 시인의 「집 부수기」에서부터 최송강 시인의 「즐거운 낙지」까지 언어로 짓고 부수는 집의 몸, 몸의 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유경 시인이 물리적으로 형체가 사라지는 ‘집’ 앞에서 수십 년 절은 삶의 흔적이 모조리 지워지는 것을 보고 참담함과 무상함을 느꼈다면 박제천 시인의 「비의 집」은 상상력으로 지은 환상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시인의 마음이 애틋하게 가 닿는 곳마다 집을 짓는 작업은 계속될 모양이다. 김신용 시인은 민달팽이의 집 없음에서 오히려 운수납행하는 자의 유유자적함을 읽어냈고 김선태 시인은 티베트의 장례 풍습인 「鳥葬」의 절차를 통해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를 차분하게 풀어나간다. 현란한 이미지의 출렁임으로 죽음의 제의를 완성시킨 「순간」이나 몸이 몸을 읽는 방식으로 통증을 치료하는 「역삼동 안마사」에 드러난 유가형 시인과 곽문연 시인의 참신한 시각도 눈여겨 볼 만하다. 새내기 이병철 시인이 보여준 치밀한 구성력과 진중함, 그리고 최송강 시인의 뛰어난 언어 감각과 재치 등이 또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끝으로 “삶이란 조심 속에 존재해 있는 것이며 죽음이란 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生於憂患, 死於安樂)라는 『孟子』의 한 구절을 위로 삼으며 글을 맺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