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즈 워드, 혹은 멀리 날아간 민들레씨
변종태 (시인)
1. 민들레의 씨앗에 대한 작은 오해
1985년 강변가요제에서 가수 박미경이 불렀던 <민들레 홀씨 되어>라는 노래가 있다.
달빛 부서지는 강둑에 홀로 앉아 있네/소리 없이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가슴을 에이며 밀려오는 그리움 그리움/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산등성이의 해 질녘은 너무나 아름다웠었지/그 님의 두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지/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이 노래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어느 순간 민들레는 속씨식물이 아닌, 포자(胞子, spore)로 번식하는 식물인 것처럼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렇듯 문학작품이나 대중 가요에 나타난 지식의 왜곡현상은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귀에 익숙한 내용을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것이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만다.
2. 이국 땅에서 꽃피운 민들레꽃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역(異域)에서 들려온 한 사람의 성공기를 들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인즈 워드, 이 시대의 문화를 읽는 또 하나의 코드가 생긴 셈이다. 언제 혼혈인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지,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미국에서 전하는 뉴스에 촉각을 세웠다. 언론사마다 뒤질세라 전하는 뉴스에 국민들은 저마다 평소에도 이 땅의 소외당하는 혼혈인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던 척하느라 마음만 바빴다. 그들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튀기’라는 놀림 어린 단어로 부르다가, 요즈음은 ‘국제가족’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는 분위기다.
필자도 아이들을 데리고 갔던 수학여행 길에 경복궁에 들른 그를 만난 일이 있다. 검은 피부에 우람한 체격,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그의 어머니가 옆에 있지 않거나, 설명을 듣지 않고는 그가 우리 민족의 핏줄이라는 흔적은 전혀 눈치챌 수 없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모국이라며 효도관광을 왔고, 온 나라 안은 더욱 그에 대한 관심으로 요란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언론의 과열된 취재경쟁을 부담스러워하면서 몇몇의 일정을 취소하고, 어머니와의 조용한 시간을 지내다가 돌아갔다.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해 우리 국민들의 시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다. 수시로 바뀌는 일정에 기자들은 곤혹스러웠을 것이고, 일정을 잡았던 관계자들은 낭패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를 보내고 나서 이 땅에 5월이 왔다.
사진 <문관철> 사진작가
3. 들꽃의 출석부를 부르다
유월이다.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나도 잘라내도 자꾸 자라나던 지난 겨울이 봄기운을 못 이기고 멀리 내빼버린 산과 들에 만화방창(萬化方暢), 흐드러지게 봄꽃이 피고 진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개불알풀, 고깔제비꽃, 광대나물, 광대수염, 괭이밥, 구슬봉이, 금란초, 꽃다지, 남산제비꽃, 냉이, 노랑제비꽃, 노루귀, 댓잎현호색, 도깨비사초, 돌나물, 둥근털제비꽃, 매화노루발, 뫼제비꽃, 미나리 냉이, 민들레, 반디지치, 뱀딸기, 벌깨덩굴, 별꽃, 병꽃나무, 복사나무, 봄맞이꽃, 산괴불주머니, 산괴불주머니, 산딸기, 산벚나무, 산수유, 산자고, 산철쭉, 생강나무, 솔붓꽃, 솜나물, 솜방망이, 쇠뜨기, 쇠물푸레, 쇠별꽃, 씀바귀, 애기풀, 양지꽃, 으름, 은방울꽃, 인동, 제비꽃, 족도리풀, 졸방제비꽃, 졸방제비꽃, 줄딸기, 진달래, 참개별꽃, 참꽃마리, 천남성, 콩제비꽃, 큰애기나리, 할미꽃, 호제비꽃, 황새냉이, 흰민들레, 흰씀바귀, 흰젖제비꽃 들이 온 산과 들을 무대로 등퇴장을 반복한다.
일일이 출석부를 부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찾아왔다가, 배웅도 없이 사라져가는 봄꽃들의 등퇴장에 유난히 눈길이 머무는 것은 시인들의 시선일 것이다. 겨우내 찬바람에 시달린 꽃들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자색(姿色)을 뽐내는 것은, 시련을 겪은 인간의 승리가 더욱 아름다운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것이 하인즈 워드의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일치한다고 말한다면 ‘억지춘향’일까. 결국 혼혈인 전체에 대한 관심의 증가가 아니라, ‘하인즈 워드’라는 커다란 꽃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봄꽃은 주로 노란 색을 띤다. 봄의 새순과 꽃이 구분돼야 하겠기에 노란색을 띠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봄꽃 중에서도 유독 시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꽃이 ‘민들레꽃’이 아닐까 싶다. 민들레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한국, 일본,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 주로 분포하고 들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4~5월에 노란 색 꽃이 피고 잎과 길이가 비슷한 꽃대 끝에 국화처럼 두상화(꽃대 끝에 작은 꽃이 많이 모여 피어 머리 모양을 이룬 꽃)가 1개 달린다. 그러니까 민들레나 국화의 꽃잎 하나 하나가 사실은 한 송이의 꽃이다.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아 얼마나한 위로이랴/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조지훈, 민들레꽃 (풀잎단장 1952) 전문
이 시에서는 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면서 외로움 속에서의 위안을 구하고 있다. 이 시에서 민들레꽃은 화자의 외로움인 동시에 그리움이 투영된 존재이며, 그대와 화자를 이어 주는 정서적 매개물로 사용된다. ‘아득한 거리’는 님과의 이별의 거리이며,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사랑의 영원성을 다짐한다. 하지만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는 임의 현신인 민들레꽃과 화자의 만남을 통해 거리의 단절감 극복을 노래하고 있다.
사진 <네이버 포토앨범>
4. 민들레꽃을 소재로 한 시 읽기
일일이 사설을 달기에는 너무나 많은, 민들레를 소재로 한 시편들이 있다. 그만큼 이 꽃은 우리 민족과 친숙한 꽃이며, 봄날의 들판을 장식하는 봄꽃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의 전체적인 감상을 위해 가급적이면 설명을 달지도 말고, 생략하지도 말고 전편을 읽어보기로 하자.(이하 인용문의 굵은 글씨체 필자)
바보야 하이연 민들레가 피었다./네 눈썹을 적시우는 문둥병의 하늘 밑에/히히 바보야, 히히 우습다.//사람들은 모두 다 남사당패같이/허리띠에 피가 묻은 고의 안에서/들키면 큰일나는 숨들을 쉬고,//그 어디 보리밭에 자빠졌다가/눈도 코도 相思夢도 다 없어진 후/소주와 같이 소주와 같이/나도 또한 날아나서 공중에 푸를리라.
― 서정주, <민들레꽃>전문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 이문재, <민들레 압정> 전문
그 날//당신이 높은 산을//오르던 도중//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하릴없이//무너지는 내 마음이//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그 많은//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곽재구,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전문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생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걷다가 또 쉬는데/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 문인수, <꼭지> 전문
나른한 어느 봄날 오후/나는 뒤뜰 흔들의자에 앉아/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들었다/무엇인가 간지러워/잠을 깨었더니 집 똥개가/어린 조카가 싼 물똥을/핥아먹은 그 혓바닥으로/내 발등을 핥고 있었다/입수염엔 물똥을 묻인 채,/그 옆에서 물똥처럼 노오란/민들레꽃이 배를 움켜쥐고/요절복통을 하고 있었다
― 김선옥, <민들레와 똥개> 전문
일하러 가니?//걸어서 걸어서 시내버스를 타고/버스에서 내려서는 또/걸어서 걸어서 출근하는 아침//민들레꽃이 토끼풀 사이로 고갤 쳐들고/내게 묻는다//뻐꾸기 소리 한 가락/파랗게 묻어나오는 봄산을/저만큼 바라보며 걸어가는데//일하러 가니?//길섶에서 앙증스레 고개를 드는/키 작은 풀꽃//쏘나타로 아반떼로/크레도스로 다들 일찌감치 지나가버린/그 길을//꿈결같이/민들레꽃 샛노란 웃음같이/걸어서 걸어서.
― 강인한, <민들레꽃>전문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날 찾아가 보면, 어느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 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 김상미, <민들레> 전문
민들레 꽃씨들. 메시지를 쳐댄다/흩날리는 민들레 씨앗/하늘에 흩어진다//거리에 흐드러진 민들레 신호음//보관된 편지 삭제 중/민들레가 몸을 턴다//다시 너에게/메시지,/메시지가 날아간다//사서함, 보관된 편지 5개/후두둑 피는 한 무더기 민들레꽃/문자가 떴다//너에게 나를 전송한다/방금 너가 도착했다
― 정희, <휴대 전화가 불타고 있다> 전문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꽃씨만 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땅에서 하늘에서
― 이해인, <민들레> 전문
민들레 풀씨처럼/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슬픔은 왜/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슬프지 않은 것일까/민들레 풀씨처럼/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 류시화, <민들레> 전문
문상이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남은 자와의 관계를 지불하는 의식, 부조금이란 사자가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날 때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대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그러나 결국 죽은 자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속이 붙는다 시속 140킬로미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은 이 순간 무엇이지, 무엇, 퍽, 무인카메라의 후레시가 터지고 일순,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드러낸 과속의 덩어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 가고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 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 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 박제영, <우연> 전문
새 학기가 시작되고 우리들 가슴마다/설레이는 5월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교실 창밖에서 떠돌던 홀씨 하나/살포시 날아들었네/어느 바람의 손길이/널 이리로 보냈니/오그린 손옹당이 안에서 파르르 몸을 떤다/가도가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뿐인/너의 기나긴 고통의 여정을 생각하면/정직한 노동이 어느 한 곳 뿌리내리지 못하고/멸시와 착취와 탄압이 샌드백이 되는/멍든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른다/선생님은 네 종족의 대이동을 가리키며/떠남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운동이라고/말씀하시네 봄날 푸른 하늘에/혁명군처럼 자욱히 떠올라 날아가는 저들을 보면/어찌 믿음을 갖지 않으랴/너의 선조들이 절정의 꽃으로 피어났던 시절이 있었음을/그처럼 너희 또한/수많은 씨앗이 씨앗인 채로 남아/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맨몸으로 뒹굴거나/시커먼 차바퀴나 구두 뒷굽에 밟혀 이름도 없이 죽음을 맞더라도/끝끝내 살아남은 동지들이/이 땅 곳곳에 질긴 뿌리를 뻗어내려/새봄에 관한 꽃망울을 터뜨리리라는 것을/호오!/하고 입김을 부니/홀씨는 보송한 솜털을 흔들며 주저 없이 햇살 속으로 날아오른다/가거라/힘찬 네 동지들의 대열로.
― 김종욱, <민들레 홀씨> 전문
새들이 깃털 속의 바람을 풀어내면/먼 바다에서는 배들이 풍랑에 길을 잃고는 하였다/오전 11시의 봄날이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것은/저 작은 새들이 바람을 품으며 날기 때문인 걸/적막한 개나리 꽃 그늘이 말해줘서 알았다/이런 때에 나는 상오의 낮달보다도 스스로/민들레인 그 꽃보다도 못하였다/나를 등지고 앉은 그 풍경에/한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나는 바보 같았다
― 심재휘, <봄날> 전문
여자가 구석에 세워두었던 시간을 깬다.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끝을 손목에 들이댄다. 구인광고와 구직광고 사이 방 있음과 방 구함 사이, 모래알맹이를 삼키던 여자 계단을 오르던 여자의 관절은 쿠르릉, 쿠르릉 밀려오는 먹구름 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몸을 날려 못처럼 박히고 싶었다. 비가 그쳤을 때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의 푸른 레인코트를 보았다. 몽골 대륙 어디쯤에선가 흙바람이 불어왔다. 어디로 가는 길일까 여자의 푸른 레인코트는 묻지 않았다 노란 단추 몇 개가 꽃을 피우려는지 꿈틀대는 것 같았다
여자는 대지의 후손이었을까
― 김효선, <민들레> 전문
사진 <네이버 포토갤러리>
5. ‘민들레’라는 기호에 대한 인식
상당수의 시인들이 ‘민들레꽃’을 노래함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우선 ‘소외’와 ‘장애’이다. 아무리 좋은 생육환경에서도 민들레는 그 잎이나 꽃대가 그리 키높이 자라는 풀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민들레의 시선은 낮기만 하다. 그것도 억센 대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여리디 여린 꽃대를 세워, 그 위에 버거울 만치 무거운 꽃을 매달고 살랑바람에도 연신 고민의 언어를 흔들다가 마침내는 솜사탕 같은 씨앗을 바람에 흩날리며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생장환경이나 외모에서 시인들이 읽어내는 것은 그 누구도 쉽사리 눈길을 주지 않는, 소외된 자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낮게 엎드린 상태에서 노오란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은, 흡사 연꽃이 진흙 구렁텅이에 뿌리를 박고, 썩은 물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웅덩이 위로 찬란한 꽃을 피워 올려 ‘대각(大覺)’이나 ‘부처’를 상징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낮게 엎드린 채 일생을 살다가 노오란 꽃을 피우는 것도 이렇듯 좌절하지 않는 현실 극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시인들이 주로 주목하는 것은 ‘씨앗’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비록 ‘홀씨’는 아니지만, ‘홀씨’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과 너무나 흡사한, 그래서 서러운 운명을 간직한 꽃이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감내한 부모의 모습일 수도,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는 비운의 사랑일 수도, 그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결국 운명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정서를 민들레의 씨앗에서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제 땅에 붙박혀 살 수 없는,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운명적인 방황과 갈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하인즈 워드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민들레의 씨앗이 여물어 강한 바람에 날려 어느 이역(異域)에 떨어지더라도 강한 뿌리를 내려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길 기원해 본다. 그것이 우리가 평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 들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1) 홀씨는 포자(胞子)라고도 하는데 꽃을 피우지 않는 민꽃식물이 무성생식으로 포자(홀씨)를 만들어 바람에 흩날려 이동하는 것으로, 민들레는 민꽃식물과 달리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4~5월에 꽃을 피우고 5~6월에 열매를 맺는 식물로 분류법상 민꽃식물도 아니고 홀씨로 번식하지도 않지만 바람에 씨를 날리는 점은 홀씨식물과 비슷하여 민들레 씨앗을 홀씨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홀씨를 볼 수 있는 식물로는 양치식물, 선태식물, 균류 그리고 조류 등이 있는데, 양치식물은 고사리, 쇠띄기, 일엽초, 고비 등이 있고, 선태식물은 우산이끼, 솔이끼 등, 선태식물은 수중 생활에서 육상 생활로 옮겨가는 중간 단계의 식물로 녹조식물, 균류에는 곰팡이나 버섯 등이 있고, 조류는 파래, 모자반, 톳, 미역 등 바다에 사는 민꽃식물류가 있다.
다픙사람들 (2006년 여름호)
변종태 시인
제주 출생
제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 제주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귤림문학동인
신성여자중학교 교사
계간문예 <다층> 주간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새미)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다층)
논문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 연구-화자,화제,초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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