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 / 박정진
대륙의 꿈이 돌고 돌아 끝내
동해에 돌로 박힌 곳
바라볼 건 일출이요
들리는 건 파도와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깎아지른 암벽은 하늘을 치솟아 외로움을 내 품는데
그 틈새로 자주 빛 참나리 향을 품고 있다.
넌 대륙의 마지막 정절
일찍이 너같이 홀로 있다고 이름을 붙인
당돌한 섬은 없었다.
넌 우리 의지의 결정
목숨 걸고 절벽에서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친 헌화가(獻花歌)의
옛 신선, 예 살아있구나.
이런 곳에 홀로 피는 꽃이나
그 꽃을 꺾어 바치는 마음이나
이런 곳에 홀로 박힌 몸뚱어리나
모두가 꽃이다.
동해 제일 끝에서 육중한 몸을 흔들어
맨 먼저 잠을 깨어 달려 나와
일출을 온 몸으로 받아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암청색 네 몸뚱어리, 넌 우리의 수호신
나라를 지키고자 산골(散骨)한
문무대왕이 여기 나와 있구나.
홀로 있지만 그 속에 두 세계 감춘
동 섬, 서 섬, 암 바위, 수 바위
그대로 석화산(石花山)이로다.
육지를 육지로 달려와
바다와 하늘을 하나로 품는 네 모습 장하다.
해동성인(海東聖人)이로다.
시작노트
독도라는 시는 모두 30행으로 구성된 시다. 시의 기승전결, 즉 호흡으로 보면 ‘동해 제일 끝에서 육중한 몸을 흔들어’(18행)부터 후반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전반부는 독도가 단순히 하나의 섬이 아니라 대륙에서부터 연결된, 대륙의 연장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바다에 밑에 숨겨진 독도의 몸통, 뿌리를 상기시키면서 그 웅장함과 존재론적인 완결성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묵객들은 호에 돌 석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돌은 본래 존재론적 완결성, 전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흔히 비유된다. 불변성, 부동성, 완고성 때문일 것이다. 독도는 과거에 ‘독섬’이라고도 불렸다. 독섬은 바로 돌섬이라는 뜻이다.
먼저 시 전반부에서 독도는 대륙의 방황을 마감하고 동해라는 곳에 박혀 제자리를 잡아 좌정하고 있는 선사에 비유되었다. 독도는 찬란한 태양과 마주하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광활한 바다의 해인삼매에 빠진 채 파도를 벗 삼고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를 연민하면서 삼매에 빠져있다.
찬란한 일출을 받으며 좌선하고 있는 독도라는 선사는 이렇게 되뇐다.
‘본심본태양, 앙명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 昻明人中天地一)’
천부경에서 나오는 이 구절의 뜻은 ‘본래 마음은 태양에 근본하고 있으며 태양을 향하여 좌선에 들면 혼연일체, 주객일체가 되어 마음 가운데 하늘과 땅마저 하나가 된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완성에 가까웠다고 할지라도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들지 않은 한, 존재의 고독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외로움은 모든 존재의 특성이며 외롭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실존의 한계상황이다.
그러나 그 존재의 외로움은 저마다 향기를 품고 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향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저마다 꽃이다. 독도의 향기는 자주 빛 참나리로 상징된다. 참나리는 독도에 자생하는 아름다운 야생화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독도만의 향기를 품고 있다. 참나리는 언제나 그 향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터뜨릴 듯 향기를 품고 있다.
완성된 선사에 비유된 독도는 이제 대륙의 마지막 정절로 대표된다. 대륙은 온갖 양육강식과 침략과 수탈과 피로 얼룩져있다. 아무리 생존경쟁, 권력경쟁이라지만 인간사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독도는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그 오욕에 물든 대륙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면서 정절을 지키고 있다. 고고(孤苦)한 선비에 비유된다.
독도의 인격은 점점 완성도를 높이는 가운데 일종의 불교의 천상천하 (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과 연결시키면서 ‘홀로 있음’이 결코 오만이나 인격의 완성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속세를 극복하는 절대세계의 추구와 도덕적 전일성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선비가 불행한 것만 아니다. 인생이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도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가치있는 것이기도 하다. 선비의 원형인 신선을 찾아 시는 신라의 향가 속으로 타임머신을 탄다. 풍류정신의 본토인 신라로 돌아간다. 신라는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우리나라의 섬으로 만든 결정적 사료를 가진 나라이다. 신라의 동해안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하다. 독도를 동해안으로 끌어당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나의 상상력은 독도의 암벽과 더불어 절벽에서 꽃을 꺾어 귀부인에게 바치는 것을 노래한 신라 향가 ‘헌화가’로 비상한다. 독도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의 등장과 함께 시공을 초월한다. 그럼으로써 독도는 바로 우리나라의 동해안으로 흡입되면서 충정(忠情)의 무대로 승화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수로부인(水路夫人)에 나오는 헌화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양주동 해독>
소를 끌고 가던 한 늙은이가 순정공의 아내인 수로부인에게 절벽 위의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불렀다는 4구체 향가인데 신라인의 소박하고 보편적인 미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나는 독도를 지키는 심정을 마치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는, 견우노인(소를 끌고 가던 노인)과 같은 심정으로 임해야 함을 역설하고 싶었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희생이고 헌신이다. 이 구절을 통해 동시에 독도가 우리 민족의 역사과 더불어 살아온 섬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게 된다.
<신라 성덕왕대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든 도중 바닷가에 당도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옆에는 돌산이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서 그 높이 천 길이나 되는데 맨 꼭대기에 진달래꽃이 흠뻑 피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꽃을 보고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더러 이르기를 “꽃을 꺾어다가 날 줄 사람이 그래 아무도 없느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올라 갈 데가 못 됩니다.” 모두들 못 하겠다고 하는데 새끼 벤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늙은이가 옆에 있다가 부인의 말을 뜯고 그 꽃을 꺾어 오고 또 노래를 지어 드렸다.>
독도는 이제 일개의 섬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신적 존엄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가진 우리나라를 지키는 꽃으로 승화한다. 독도에 핀 꽃과 그 꽃을 꺾어 바치는 마음과 독도는 이제 한 송이, 한 몸뚱어리의 꽃이 되어 혼연일체가 된 가운데 일차적으로 독도시의 전반부는 완성된다.
전반부는 독도의 존재론이라면 후반부는 독도의 양태론에 해당한다. 독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몸짓을 노래하였다. 독도는 정지된 돌덩어리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인격이면서 태양과 항상 교감하고 승천을 꿈꾸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면서도 독도는 안으로 존재의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각종 세파를 포용하고 숨기면서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느라 몸은 이미 암청색이 되었음을 노래했다. 암청색은 어려움을 극복해낸 상징적 색깔이다. 암청색에는 아직 힘이 살아있고, 무언가 큰일을 해낼 것 같은 신비감(神秘感)과 신이성(神異性)이 감돌고 있는 색이다. 그러니 이 암청색은 자연스럽게 수호신이 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호신은 뭐니뭐니해도 문무대왕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한민족’을 실증적 역사적 개념으로 달성해낸 대왕이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장군이 있고 임진왜란을 물리친 성웅 이순신장군이 있지만 한민족을 완성한 문무대왕만한 수호신은 없다. 이 문무대왕은 죽으면서도 나라가 걱정되어 자신의 뼈를 왜구가 들어오는 동해바다에 뿌리게 했다. 자신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역사적 흔적이 바로 경주 아래 감포 바닷가에 있는 대왕암이다. 오늘의 독도는 바로 동해의 대왕암과 치환이 된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한국과 숙명적으로 역사적 긴장관계를 지속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이다. 이는 조선중기의 임진왜란과 최근세사의 일제식민의 역사가 이를 더 잘 말해준다. 이는 신라 때부터 예견된 것인가 보다. 문무대왕이 오죽했으면 동해용이 되었을까. 일본은 때로는 선린으로, 때로는 외적으로 만난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한시라도 한눈을 파는 날엔 침략의 희생자가 된다. 그렇다고 가까운 나라와 매일 원수지간으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일본의 침략을 염려한 대왕은 자신이 죽어서 동해 용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유언하여 민족을 안심시키는 한편 민족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보장하려 했다.
삼국통일 시기에는 대왕암이 일본과의 최전선이었지만 지금은 독도가 그 책임을 지고 있다. 독도는 대왕암과 동격이 됨으로써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상징물이 되는 운명에 처해버렸다. ‘독도전쟁’이라는 말도 이미 생겨났다. 이는 너무 앞서가는 예언이고 오두방정이고 콤플렉스일까.
이런 가운데서도 나는 독도를 침략과 방어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독도의 비상과 승천을 은연중에 도모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독도라는 작은 섬에서 거대우주는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을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주의 음양론과의 랑데부--. 독도의 암수, 동 섬과 서 섬을 동양의 음양론에 빗댄다. 또한 독도는 한 몸에 음양을 숨기고 있음으로써 음양, 남녀를 초월한 태극적인 인간, 절대적인 인간, 전인적 인간이 된다. 해동성인이 그것이다.
‘해동성인’으로 이 시는 끝을 맺는다. 이로서 독도는 단순히 일본과의 영토전쟁의 대상이 되는 섬이 아니라 한민족으로 하여금 성인을 꿈꾸게 하는,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는 민족적 상징물로 크로즈업 된다.
비록 영토문제와 영토분쟁의 대상으로 오늘날 독도가 거론되지만 우리민족은 그 이전에 이미 문화적으로 독도를 오래 동안 함께 해왔으며 향유해왔음을 천명하고 있다. 독도를 생명이 있는 섬이며 문화적으로 승화되는 ‘문화적 독도’임을 천명한 셈이다.
박정진 시인
대구에서 태어나(50년) 한양대 의예과를 수료(71년)하고 동대학 국문과로 옮겨 졸업(74년)한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석사(80년), 박사과정(86년)을 마쳤다. 한양대, 서울교육대, 영남대, 대구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80년-현재까지).
대학 졸업 후 경향신문사에 입사(76년), 주로 문화부기자(76-88년)로 활동하다가 자리를 옮겨 세계일보 문화부장(92년), 논설위원(97년)을 지내는 등 20여 년 간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시 전문지 월간 ‘현대시’를 통해 ‘황색나부의 마을’로 시단에 등단했다(92년). 현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인류학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저술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92년 미래문화사) <여자>(2006년 신세림) 등 총 저서 60권
시집 <해원상생, 해원상생>(90년 지식산업사) <시를 파는 가게>(94년, 고려원) <대모산>(2004년 신세림) <먼지, 아니 빛깔, 아니 허공>(2004년 신세림) <청계천>(2004년 신세림) 등 5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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