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시란 무엇인가> 총론
생명의 언어, 지예至藝와 지도至道의 시 / 정효구
1. 글을 시작하며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처럼 난처하다. 그러나 이런 물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시쓰기는 물론 인간들의 삶도 한층 팽팽한 탄력 속에서 생기를 뿜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물음은 정확하고 보편적인 답을 즉각 얻어내는 데 목표가 있다기보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 그 자체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 정답을 기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 그럼으로써 질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답도 함께 의미를 갖게 하는 질문, 그런 질문이 바로 이런 유형의 것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현대시론은 추상화와 관념화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시론이란 이름의 책을 다 통째로 외워도 시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체감하고 체득하기 어려웠다. 시론은 싱싱한 물고기가 모두 빠져나간 어부의 거칠고 마른 그물처럼 물가 저쪽에서 왕조의 유산같이 내실 없이 경직된 채 유전되었다.
이번 기획은 학자가 아닌 현장의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는 정답 없는, 난처한 물음을 의도적으로 던진 것이었다. 그들에게 기대한 것은 사전적이며 교과서적인 시론이 아니라 체험적이며 창조적인 시론이었다. 그들은 눈치 빠른 학생처럼 이런 물음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주었고,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하나의 ‘체體’를 이루어, 수많은 답을 ‘용用’의 형태로 얻어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의 답을 다음과 같이 분석, 정리해본다.
2. 실체 없는 환영의 실상實相
몇몇 시인들은 시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렇다. 시는, 인생이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듯, 손에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확연히 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 시와 인생뿐일까?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실체 없이 환영의 실상을 실체처럼 보이며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시인들에게 시는 부재하는 존재이거나,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거나, ‘용用’의 작용을 위하여 ‘체體’의 형태로 존재하는 상상적 중심일 뿐이다.
김행숙이, “시는 글쓰기의 ‘사건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태 속에서 움직인다. ‘쓴다’라는 행위 이전에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영원히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으리라”라고 말했을 때, 이근배가 “나는 시를 모른다. 쉰 해 가까이 시인이라는 헛이름을 달고 품팔이를 해오고 있으면서 정작 시를 써보겠다고 붓을 들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시를 만나본 일이 없다”고 말할 때, 시는 미지의 실체이고, 환영의 실체이며, 부재의 실체이다.
그러나 미지는 힘이 있고, 환영은 강인하고, 부재는 매혹적이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써왔듯이 앞으로도 쓸 것이다.
같은 문맥에서 손택수의 실체 환상론은 더욱 흥미롭다. 그는 “시라는 것이 ‘수평선’처럼, 멀찌감치 물러나서야 눈에 들어올 뿐,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없는 그 한 줄의 수평선이 그에겐 시라는 실체로 보이고, 그 없는 한 줄의 수평선에 의지해서 그의 시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그 한 줄의 수평선에 대한 이끌림으로 시를 쓴 손택수의 시작 행위는 소비인가, 탕진인가, 창조인가, 생산인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의미와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그의 시쓰기가 생명의 본능적인 지향성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손택수는, 더 나아가 이런 수평선에의 이끌림이 때로는 그리움을 넘어 무서움과 현기증까지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환영의 부름 앞으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달려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런 한가운데서 생과 예술의 드높은 미학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성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실체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시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되, 천변만화의 표정으로 나를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그)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가슴이 설레고, 조금쯤은 흥분되거나 긴장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라는 실체는 존경할 만한, 그러면서 변함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을 향하여 의심 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가 시인을 맞이하는 표정이 천변만화의 작용 속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의 시에 대한 실체적 인식이 진공眞空의 그것처럼 집착 없는 공의 세계와 같은 것이라면, 그는 이를 토대로 한 묘유妙有의 시적 작용 앞에서 흥분하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승훈의 ‘시제도론’은 또 다른 측면의 실체 부정론으로 그 의미가 크다. 그에게 시란 해석과, 역사와, 제도의 상대적이며 구성적인 산물일 뿐, 시라는 것의 본질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현대시의 역사는 지금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승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시사는 새로운 시론을 기다리고 있거니와, 그것은 본질이나 실체로서의 시론이라기보다 오직 시에 대한 자의식이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시론”이라고 한다. 과격한 시론이다. 그러나 본질주의와 환원주의의 절대성과 위험성을 넘어서는 데, 그의 과격한 입장은 유력하다. 그리고 시와의 거리두기 혹은 시의 객관화 작업에 있어서 이런 냉정성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시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시라고 믿는 것에 대한 맹목적 함몰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이다.
유심론이니 유식론이니 하는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실체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세계이다. 실체는 가변하는 현상이자 중심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환영일지라도 우리는 그 환영적 실체를 따라가거나, 만들어가거나, 의지해가면서 우리들의 불안정한 삶에 안정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실체란 말은 유무, 진위 등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생의 권태롭지 않은 건강한 전개를 위해 훌륭한 방편으로 작용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방편을 잘 쓰는 자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라면, 실체란 말 역시 그런 지혜로운 자가 삶을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훌륭한 방편물인지 모른다.
3. ‘참나’와 ‘참너’에 대한 갈망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금방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시의 실체에 대한 갈망만큼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갈망은 간절하고 영속적이다. 굳이 말한다면 시라는 실체를 부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라는 실체를 부정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저쪽에 있는 시와 달리, 이쪽에 있는 나는 지금, 여기에, 이렇듯 생생한 생명으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에 대해 묻기 전에 나에 대해 묻는지 모른다. 아니 시에 대해 물으면서 나에 대한 물음을 동반시키는지도 모른다. 이런 처사가 때로는 과도한 이기성과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힐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물론 시인까지도 나에 대한 관심은 집착에 가깝게 빈틈없다.
이번의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서도 이와 같은 점은 그대로 드러났다. 시인들의 ‘나’에 대한 관심과 갈망은 지속적이고 생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물증이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는 몸을 받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것이 생물학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주적인 것이든 간에, 나의 발견과 표현과 보살핌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달자는 시를 “내 몸과 정신의 난타 공연”이자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이라고 규정하였다. 최영철은 “말하고 싶어 쉴새없이 몸이 들썩였던 것”이라고 하였으며, 천양희는 “절망이 부양한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라고 하였고, 이선영은 “정신과 육체의 분비물의 총합”이라고 하였으며, 신현정은 “존재 자체를 헐겁게 느슨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고, 정일근은 “시는 나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신대철은 “몸 속에서 울부짖는 생명의 소리”라고 하였으며, 김규동은 “가슴에 뭔가 이리도 넘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몸과 내면은 항상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그 균형과 조화의 다른 이름이 평화요, 안정이요, 안심이다. 그러나 그 균형과 조화는 생명의 역동적 균형이자 조화이기에 사실상 온전한 균형과 조화는 찰나의 일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듯 늘 혼란스럽고 불안정하다. 넘치거나 모자라고, 느슨하거나 긴장돼 있고, 맺히거나 풀어져 있다. 그런 나, 그런 부족한 나를 진단하고, 보살피고, 다스리는 일의 일환이 시쓰기이다. 그렇게 볼 때 건강한 나를, 참다운 나를 창조하고 구축하는 일, 그런 일이 시쓰기의 한 근거이자 거점이다. 여기서 시는 표현론이 되고, 생명적 균형론이 되고, 치유론이 된다.
시와 진아眞我의 만남이란 문제에 있어서 김중식과 박남철의 말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중식은 그의 시론에서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박남철은 “시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어서 잡지에 한번 발표해보기”라고 우회적 표현을 하며 시인의 자기노출성의 위험함을 경고하고 고발하였다.
김중식이 ‘참나’의 문제를 목전에 두고 사생결투하듯 자폐와 해탈의 극단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자 한 일이나, 박남철이 시가 시인의 자기노출적인 호객행위로 전락하는 것을 시니컬하게 지탄한 일은 자아의 엄결성嚴潔性을 지키고자 한 모습이다. 불순하지 않은 자아, 물들지 않은 자아, 휘둘리지 않는 자아, 그런 자아를 만나고, 지키고, 그런 자아의 속엣말을 경청하는 일의 소중함이 여기서 환기된다. 그러나 이런 엄결성은 일면 위험하다. 하지만 위험하기에 다른 면 숭고하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던 김중식은 “드디어 극단적인 자폐도, 그렇다고 해탈도 아닌 자리를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비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이런 삶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라는 말 대신 나의 삶이라는 말을 혼용하여 쓰곤 하였다. 김기택의 “체험”론도, 오탁번의 “저녁연기”론도, 허영자의 “존재 확인”론도, 천양희의 “자작自作나무”론과 “내 전집全集”론도, 노향림의 “삶 자체”론도, 유안진의 “신발론”도 모두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그런데 ‘참나’는 참다운 너를 필요로 한다.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참다운 너로 표상되는 사물, 세계, 대상, 객체, 만상 등과 같은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진아眞我와 짝을 이루는 진여眞汝의 세계였다. 그 진여의 세계는 호기심의 세계이고, 관음증을 유발시키는 세계이고, 발견의 기쁨을 무한으로 느끼게 하는 세계이다.
어찌 보면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나르시시즘의 다른 측면 같기도 한 참다운 너의 발견은, 시가 자기중심적인 노출이나 발설만이 아닌, 타자중심의 경청과 타자가 지닌 진실의 발견이라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이건청은 시란 “우주의 무한천공에 펼쳐진 비교록秘敎錄의 내용을 가능하면 더 많이 훔쳐내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 쉽게 말하여 “최초의 사물”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인데, 이런 그의 시론 속엔 사물에 대한 경외가 깃들어 있다. 사물이란 비교秘敎를 간직하고 있는 경전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가림은 이런 맥락에서 시란 “언어의 탄환으로 사물의 핵심, 또는 삶의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는 행위”라고 말하였다. 사물의 핵심이 있기는 한가. 마찬가지로 삶의 진실이 있기는 한가. 그러나 이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 시인이 있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가림 역시 사물 편에 서서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다.
박형준도 비슷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곳에 함몰되었는가를 자각한다. 그러면서 너의 편에서, 사물이나 타자의 편에 서서 자신을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너와 나 사이에 깃드는 침묵의 생생한 자장에 눈길을 주어 보라고 당부한다. 내가 아닌 너에게로 시선을 양보하는 일, 그런 일로 인해 상호간에 깃드는 신성한 침묵을 보는 일, 그것이 시쓰기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나도, 너도 진실하지 않다. 그래서 굳이 진아니, 진여니 하는 수식이 붙은 말을 번거롭게 사용해야 한다. 시라는 것은 바로 이 진실하지 않은 나와 너를, 진실한 나와 너로 들어 올리고 피워내는 일, 그럼으로써 나의 삶과 너의 삶을 진실의 문맥 위에 놓이게 하고 그 위에서 싹트게 하는 일, 내가 나의 참된 삶을 살듯, 네가 너의 참된 삶을 살도록 기원하는 일, 그런 일이라고 이 장의 시론을 간추려 정리해보면 어떨까 한다.
4. 일심一心과 일체一體의 순간에 대한 소망
일심과 일체는 소망의 세계이지 현실의 세계이기 어렵다. 그러나 간혹 주객이 하나가 되는 빛나는 일심과 일체의 순간이 찾아오고, 단절된 것들이 한 곳으로 이어지는 원융의 순간이 방문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무한한 환희심에 빠진다.
여러 시인들은 이런 순간을 시적인 것으로, 시의 세계로 파악하였다. 이런 견해는 고전적인 시론의 일부 같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분 이전에 이야말로 시가 지닌 근본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김종길은 “깨달음”, “깨침”과 같은 말로 그 일심과 일체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깨달음과 깨침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그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전인격적 통찰이자 지혜이다. 그는 이와 같은 깨달음과 깨침이야말로 시적 고양감에 이르는 부력이라고 한다.
깨달음과 깨침은 만개한 꽃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사심 없이, 걸림 없이, 존재의 속을 환히 관觀할 수 있게 되면, 시인을 포함한 모두는 역시 황홀경, 전율, 감동, 환희심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최고조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문인수는 이런 사실을 “길은 식물의 물관부와 같은 것일까. 한참 빨려 들어가다 보면 사람이, 사람의 영혼이 문득 새로 눈뜨거나 피어나는 데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잠시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멈춤은 일심과 일체의 정지된 순간이다.
고두현 역시 이런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시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견딘 뿌리, 삶의 극점에서 단 한 번 피우는 꽃”이라고 표현한 그는 시적 순간의 틈 없는 만개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절정은 정지다. 그 절정에 이르기 위해 긴 예비의 시간이 있다. 그것을 발효의 시간이라고 하기도 하고, 견딤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슨 말로 부르든 간에, 절정의 아랫도리는 깊고 튼실하다.
이런 순간을 김종해는 암호로 표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암호라 할지라도 그는 암호에 의해 누군가가 고스란히 감전되기를 소망한다. 김종해는 이런 암호의 비밀스런 내통, 은밀한 내통의 확장과정, 내통과 확장 속에 끼어든 사랑이란 이름의 일심과 일체와 교감을 중시한다.
일심과 일체의 순간이란 제목 앞에서 정진규의 시론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의 논의 내용과 다소 다른 문맥에서, 그는 시의 일심성과 일체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시는 몸이다. 그것도 생체生體이다. 살아 있는 전일체이다. 아무런 유위법有爲法도 가해지지 않은 무위법無爲法으로서의 시, 그런 시의 생성을 그는 말하고 있다.
시가 무위법에 이를 때, 시는 인공을 떠난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생체가 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생물인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그의 시관은 시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아지는 것이라는 생물의 비유를 지속하게 만든다. 시는 여기서 고도의 미학이 마침내 우주율과 동행한다는 신비적 신명神明의 성질을 보이게 된다.
시는 비동일성의 시학에 머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반드시 옳거나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심층에 내재한 동일성에의 꿈은 강력하고, 그 성감대가 울릴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런 점에서 일심과 일체는 영원한 시적, 인간적 화두이다. 그에 도달하여 크게 울고 싶은 것이 모든 존재의 소망이다.
5. 진언眞言에 대한 갈망
진언은 보통 주술적 언어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실한 말, 적실한 말, 울림과 감동이 있는 말, 존재의 핵심을 포획한 말 등과 같은 의미로 이 말을 평범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이번의 응답에서 시인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시론에서 시가 언어의 양식이라는 점을 크게 역설한 것에 비추어본다면, 이번에 시인들이 언어에 대해 보여준 관심은 다소 낮은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언어의식은 살펴볼 만하다. 다같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시인마다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호기는 시를 “언어적 구성물”로 규정한다. 이 규정 속의 ‘언어’라는 말도, ‘구성물’이라는 말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언어도, 구성도, 인공이기에, 그는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 구성의 질서를 버리고 시라는 실재에 합치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그때 그는 몸의 질서로 언어와 구성의 질서를 보충한다. 여기서 몸의 질서는 인공의 언어를 진언으로 만드는 육성의 숨결이다. 그렇다면 육성과 문화적 언어가 만나는 자리, 그 자리가 그에겐 시이다.
허만하의 시론도 흥미롭다. 그는 시를 가리켜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실천”이라고 한다. 결국 시란 그 방법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고도의 화법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무엇을 말하려고 하기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허만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그것은 절대자유의, 자존의 절벽 같은 세계이다. 이 세계는 그에게 신성하다. 그것은 진실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화법으로서의 언어는 진언이다.
조정권이 시의 언어를 사유 이전이거나 사유 이후의 “심득心得된 말”로 규정한 것, 김종해가 시어를 밀실의 암호 같은 존재라고 규정한 것, 이승하가 시어를 극점의 언어이자 극한의 언어라고 고백한 것, 이 모든 것은 다 언어의 절대성 혹은 절대적 언어에 대한 갈망을 전달한 것이다. 도저히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 없는 언어, 비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언어, 틈 없는 몸의 언어, 그런 언어를 그들은 시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언희의 언어관과 장석주의 언어관은 독특하다. 김언희는 숟가락과 같은 언어로 단지가 표상하는 대상과 우주의 무한성을 겨우 가리거나 가리키는 것이 시쓰기라 말하고, 장석주는 거대한 부재의 권태를 견디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문자(언어)를 동원하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들 시인에게 언어는 한계의 산물이고, 이승의 어쩔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가 진언이 되기를 소망하는 꿈만은 동일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헛된 반복을, 그것이 비록 다른 반복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할 수는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한편 이수익은 직접 언어라는 말을 시론에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시어가 관념화와 추상화를 넘어 “너무나도 확실한 물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물증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이다. 그때 언어는 물질과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존재와 언어 사이에 틈이 없어진다. 소위 언어의 물화작용이 철저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실상實相의 언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실상은 진언으로써만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는 진공眞空의 세계이다.
6. 글을 마치며
이번의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그들에게 시는 텍스트로 대상화되기 이전에 그들의 삶 자체였고, 인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문화 이전의 생물학적 육성이나 활동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의 온전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절실한 행위이자 생생한 행위였다.
둘째로, 그들은 기존 시론의 대부분을 이루어 온 이른바 분석시론의 영향권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비유니, 이미지니, 리듬이니, 문체니, 기승전결이니 하는 메마른 수사학적 기법을 역설하지 않았다. 그들이 언어를 비롯한 수사학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삶과 몸과 생명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시에 대한 자부심을 여전히 크게 지니고 있었다. 시인됨을, 시쓰기를, 시라는 존재를 드높은 인간문화의 양식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무가 시인은 금기와 싸우는 자라고 규정한 것, 김광규가 시를 도구화에 항의하는 마지막 노래라고 규정한 것, 허만하가 인간은 시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짐승과 구별될 수 있었다고 말한 것 등은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넷째로, 그들은 여전히 이상주의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지예至藝가 지도至道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그들의 시적 선택을 비장하게 여기는 고전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태주가 시는 “시인이 선택한 가시면류관”이라고 하였을 때, 이런 점은 극에 달한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시는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시의 교훈성과 계몽성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화나 고백의 자세를 취하였다. 역시 그들은 경직된 사회성과 역사성도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가 그만의 자율성을 버리고 외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효구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박사학위 받음. 1985년 《한국문학》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 '시와 젊음'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시 읽는 기쁨' 등 다수 있음.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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