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입들 외 4편 / 이영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 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검은 뿔도장 / 이영옥
닳아버린 지문 같은 오래된 검은 뿔도장
이마에 하얀 점 하나를 찍고 상한 마음을 꼭 끼우고 있다
장롱 서랍 속에 함몰된 시간을 품고 누워 있다
아버지는 30년 공무원 퇴직금을 빚보증으로 날리고 부터
막도장, 막노동, 막말, 막배,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들이 물집처럼 부풀어올랐다
막 굴러다녀도 이제 그만인
누구하나 눈 여겨 보지 않는 도장
입김을 호호 불어 힘껏 누르면
아버지의 발자국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목련 / 이영옥
뼈만 남은 손가락이 가지를 움켜잡고 있었다
다정했던 목련, 지는 모습이 이랬다
볼이 움푹 팬 병색 짙은 몰골로
자신의 전부를 갉아먹고 있었다
활짝 핀 함박눈처럼
세상을 끌고 올라가던 목련은
순백의 기억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동백처럼 삶이 가장 요염할 때
선혈이 낭자하게 자신을 뚝뚝 던져 버리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보여주며
추억을 되돌려가는 미련한 꽃
제가 얼마나 아늑하고 환한 시간을 밝혔는지 모르고
꽃 진 가지에 가장 누추한 기억 한 줄 걸어 두었다
애기 소* / 이영옥
지금 막 떨어지는 줄기찬 침묵과
오랫동안 고여 있던 침묵이 만나
서로를 강렬하게 흡입하는 애기 소
내부는 들끓고 있었지만
푸른 눈은 아주 침착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벌거숭이 아이가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무서운 침묵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냉정을 찾아간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제 모습을 비추며
고요히 비행을 마쳤을 뿐
하늘이 잠깐 진저리를 쳤을 뿐
아가, 잔잔해 보인다고 속까지 잔잔한 것은 아니란다
정적이 백기를 들고 말 걸어 올 때
먹 개구리도 겁을 먹고 울음주머니를 부풀린단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없단다
한 생이 다른 한 생과 뒤섞이고 싶어
절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저 깊고 푸른 눈,
아가, 격렬한 외로움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단다
* 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배경인 애기소 , 형상강 상류에 있으며 경주지역의 발음 특성상 <애기소>라 부른다. 다른 두 물줄기가 합류하면서 소용돌이가 생겨 땅이 파져 깊은 소가 생겨났다. 한 해에 한 명씩 아이들이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낮달이 꺼내는 새떼
-흰 접시꽃
접시꽃이 엎지른 그림자에 금이 가는 구월
낮달은 가슴을 열고 까만 새떼를 자꾸 꺼낸다
그리움을 보태거나 덜어내며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오던 접시들은
꽃이 일생동안 하나씩 공들여 빚어 온 것,
찬바람이 허공에서 하얀 접시 여러 개를 깨트렸다
새떼가 사분거리는 휜 빛을 물고 사라져도
꽃은 이듬해 새 접시를 들여 똑같은 상처를 담아 둘 것이다
꽃 지고 꽃대만 남았다는 것
허술히 담겨 있던 그리움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내 슬픔을 떠받쳐준 것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빈 꽃이 무게를 기억하는 것도
꽃대가 접시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저들이 잘 낫지 않는 환상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새떼가 석양을 꾹 찍고 빠른 등기우편으로 날아갔다
말갛게 씻긴 허공 아래 헛헛하게 서 있는 꽃대들
가진 접시가 없어 아무것도 담아 둘 수가 없다
나는 꽃 필 때부터 깨질 것을 염려했어야 옳았다
시집 <사라진 입들> 2007년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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